<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현화리는 현경면 소재지에서 함평 쪽으로 4㎞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 태통산을 주산으로 동쪽으로 감방산 북쪽으로는 칠산바다를 향하는 함해만을 접하고 있다.

예전에 목포부 현화면의 소재지가 있었던 지역으로 함평현 다경면과 합쳐져 1914년 무안군 현경면이 되었다. 이후 구산동, 성자동, 내현화동, 외현화동을 병합하여 현화리라 해서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태통산을 중심으로 외현화, 청룡, 내현화, 성자동, 절동, 노두목 등 6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절동의 무안박씨 대종가와 연방정, 내현화의 추원재와 추유재 현포정사 등이 있다.

▲ 현화마을 전경

▲김씨 최씨가 사이좋게 사는 마을

내현화는 현화3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현화리 안쪽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태통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현화천이 흐르고 현화천 너머에는 감방산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마을 앞으로는 현경에서 함평으로 넘어가는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지형은 와우형으로 아늑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주고 있어 주민들의 넉넉한 심성은 물론 많은 인물을 배출하고 있다.

이 마을은 김해김씨와 전주최씨가 각각 동족마을을 이루고 있다. 최초 입향조는 김해김씨 金錫龜(호-玄圃, 1653-1718)다. 현포공은 조선시대의 대학자 미수 허목의 제자였으며 미수가 직접 그의 호를 지어줄 정도로 스승의 사랑을 받았다. 족보를 보면 현포공은 젊었을 때 주유천하를 했으며 중국에 가 공자묘에 참배를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도산서원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마을유래지에는‘그의 조부 때 나주 노안면 금안동에서 무안읍 성동리로 이주하였다가 1683년경 이 마을로 옮겨 정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을 때는 감방산 아래 서당터에서 바라보고 잡은 곳이다.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와 1912년의 자료 등 모든 문헌에 무안 현화면 내현화로 나온다.

전주최씨 입향조는 崔仁寬(자-의경, 호-사성재, 1674-1736)이다. 공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지켰으며 주변의 인망이 높았다고 한다. 아쉽게도 그분의 행적을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

이 마을은 두 성씨가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 텃세를 부리거나 다투지 않고 화합을 이루고 있다. 주민들 말처럼 얼굴을 붉히거나 송사로 잔등을 넘어서 본적이 없다 할 정도로 화목함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한국전쟁 때도 주민들의 다툼이 없어 서로를 죽이는 피해가 없었다.

예전에는 마을 동각 옆에 커다란 당산나무 두 그루가 있어 매년 당산제를 지냈고 부녀자들은 강강수월래 놀이를 하며 흥겨운 시간들을 보냈으나 나무가 고사되면서 그런 놀이들이 사라졌다. 또한 들독이 있어 남자들의 힘겨루기 놀이를 하기도 했다.

▲자료를 볼 수 없어 안타까움만

▲ 현포정사
마을에 바우 이름이 많다. 바우백이 무수바우 할미바우 현태바우 등이 그것이다. 바우백이는 외현화 마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다. 나머지 바우들은 바닷가에 있는데 무수바우는 김장과 관련이 있다. 옛날 소금이 귀했던 시절 김장을 위해서 배추와 무를 절이는데 이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바다에 가서 했다. 그때 절인 배추나 무를 얹어 놓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무수바위 주변에 백사장이 넓게 퍼져 있었고 해당화가 많이 피었으나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다.

할미바우는 무수바우 밑에 있는데 성자동의 방죽몰에 있는 고양할미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또한 할미바우는 어부들에게 풍어를 기원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현태바우는 할미바우 밑에 있는데 현태라는 사람에게서 비롯된 이름이다. 한국전쟁 때 경찰들에게 쫒기던 현태가 마을에 들어왔다가 경찰에 들키자 바다로 나가서 이 바위에 숨어버렸다. 경찰들이 총을 쏘면서 잡으러 하였으나 날이 어두워지고 물이 들어오자 잡기를 포기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주민들은 그 바우를 현태바우라 불렀다.

당앞이란 지명이 있다. 당산나무가 있었으며 주민들 중 일부는 그곳에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소뚝거리가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을 소가 넘어간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공놀이를 했던 곳의 꽁바탕도 있다. 언안 해창다리라는 지명이 있는데 바닷가에 있는 곳으로 여수에서 온 주민들이 살았던 지역이다. 지금은 주민들이 살지 않는다. 깐치개라는 지명도 있다.

마을이 우데미 아래데미로 이루어져 있어 어렸을 때‘우데미는 구워먹고 아래데미는 씨한다’는 아이들의 동요가 전해지고 있다.

입향조를 기리는 현포정사와 사당이 있다. 현포정사는 현포공이 1707년에 세운 건물로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후 1964에 초가집을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사당은 입향조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으로 1837년에 건립하였다. 1964년 초가집이었던 것을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1칸 측면 1칸이며 내부에는 위패 2기가 모셔져 있다. 그 외에 김석구유허비가 있다. 김석구의 행적과 뜻을 기리기 위하여 일제강점기 때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전면에는‘조선국현포선생김공유허비’라 명문되어 있다.

마을에 두 개의 제각이 있다. 김해김씨의 제각인 추유재는 팔작지붕에 정면3칸 측면2칸의 건물이다. 1959년에 지었으며 주현이 10개 현판이 두 개 있다. 전주최씨 제각인 추원재는 팔작지붕에 정면3칸 측면 1칸의 건물이다. 1962년에 지었으며 주련이 4개 현판이 2개 있다.

두 성씨의 동족마을이라 주민들이 많은 자료들을 갖고 있어 정리할 필요성이 높으나 힘이 닿지 않아 아쉬운 느낌을 갖는다. 특히 입향조의 사당과 정사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자료를 이용하여 정리했으며 현포공의 직계 종가에 많은 자료가 남아있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확인을 못했다. 입향조가 마을 뿐 아니라 지역에 미친 영향이 큼에도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아 그분의 업적에 비해 드러난 것이 없어 후학으로서 안타까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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