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1789년대에 만들어진 호구총수에도 나오는 藥谷里는 본래 목포부 박곡면의 지역으로서 약초가 많이 나오는 골짜기라는 의미의 약곡이라 하였다. 몽탄면소재지에서 일로읍방면으로 2㎞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입구의 길 위로는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박곡, 언동 일부를 병합하여 약곡리라 해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원래는 한 행정구역이었으나 2005년도에 두 개의 행정리로 분리되어 박실과 약실로 이루어졌다. 약실에 무안 박씨의 삼산정, 박실에 나주오씨 제각과 김해김씨 제각 그리고 당산나무 세 그루가 있다.

박씨촌 아닌 박같이 생긴 마을

박실은 약곡1리에 속하는 마을로 박곡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박곡이란 지명의 유래는 주민들도 잘 모르고 있으나 두 가지로 추정해볼 수 있다. 하나는 박씨가 사는 골짜기라 해서 박곡이라 했다. 대부분이 그렇게 알고 있지만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박씨는 한 가구만 살고 있어 박씨촌으로 볼 수는 없다. 그것도 웃 마을의 무안박씨가 아닌 밀양박씨이다. 해서 박씨와 관련된 박곡의 의미는 무리가 따른다.

박실은 약곡1리에 속하는 마을로 박곡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박곡이란 지명의 유래는 주민들도 잘 모르고 있으나 두 가지로 추정해볼 수 있다. 하나는 박씨가 사는 골짜기라 해서 박곡이라 했다. 대부분이 그렇게 알고 있지만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박씨는 한 가구만 살고 있어 박씨촌으로 볼 수는 없다. 그것도 웃 마을의 무안박씨가 아닌 밀양박씨이다. 해서 박씨와 관련된 박곡의 의미는 무리가 따른다.

두 번째로는 지형에서 관련된 지명이다. 약곡리의 지형은 호로병처럼 생긴 모습으로 좁은 입구를 들어서면 넓은 터가 나온다. 마치 호박과 같은 종류로 박덩굴과의 표주박의 모습처럼 생겼다. 해서 박씨촌이 아닌 표주박의 모습을 띤 골짜기가 박곡이 아닌가 여겨진다.

문헌을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박곡면 약곡리만 나온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엔 박곡면 구박곡리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박곡면 약곡리 구박곡으로 나온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김해김씨 金載振(자-行敏, 1609-1670)이다. 그는 영광 불갑에서 세거하였으나 병자호란 등 당시의 혼란을 피하여 이곳 박곡 마을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시류에 흔들리지 아니하며 덕을 기르니 주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약실마을의 입향조인 박무원보다 더 먼저 이 마을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 마을은 원래 천씨가 살았다 하나 지금은 한 가구도 없고 김해김씨를 비롯한 복합성씨가 살고 있다. 약곡1리는 이 마을을 포함하여 개라울 박울매로 이루어졌다. 약실마을과는 5년 전에 행정적으로 분리되었다.

약실엔 藥草 박실엔 藥水

개라울은 佳也月 또는 月桂라고 불렸으며 좁싸리 고랑이라고도 했으며 얼마 전까지 여우가 잡히기도 하였다. 현재 약곡정이 있는 골짜기를 새터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 뒤 골짜기를 살펴보면 약실 마을과 경계인 청룡등 옆에 감남골[甘南谷]이 있다. 감남골 옆의 숯구뎅이를 지나 윗 용골과 아랫 용골 그리고 815번 지방도로에서 들어오는 입구의 북잿등과 서당골이 있다. 숯구뎅이는 골짜기에 불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었으며 용골은 주민들은 연골이나 영골로 알았으나 김해김씨 족보에 龍玉洞으로 나오면서 용골로 밝혀졌다. 마치 청용리의 사동이 사옥동에서 비롯된 것처럼 용옥동이 용골로 불려진 것이다.

마을 앞의 골짜기는 성적골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남산골 방아골 풍덕골 솔학골[松鶴洞]로 이어진다. 현재 풍덕골은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무덤등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솔학골에는 장사바위가 있는데 바위 위에는 장사의 손 자국으로 알려진 흔적들이 두 군데 남아있다.

마을 입구는 길 위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입향조가 심었으리라 여겨지는 당산나무 세 그루가 있다. 큰 것은 둘레가 450mm 넘기도 한다. 그 중 한 나무는 이미 고목이 되었으나 다시 가지에 새순이 돋고 있다. 주민들은 이 나무들에 대해서 애정이 각별하다. 교회가 들어오기 전에는 주민들이 나들이 할 때마다 당산나무 앞에서 손을 모아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했던 신앙지이기도 했다. 또한 예전에 나무 아래에서 논을 경작하던 주민이 이 나무 그늘을 없애기 위해 가지를 쳤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일이 있기도 하였다.

보행기가 없는 마을

약곡 교회는 1935년 광주 양림 교회의 진공례 전도부인이 세웠다. 처음엔 명산 마을에서 포교활동을 했으나 주민들의 호응을 받지 못하자 이 마을에 들어와 전도하면서 세워진 것이다. 마을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보행기가 없다. 주민들 중 상당수가 80이 넘은 노인인데도 지팡이는 물론 보행기에 의지 않고 나들이를 한다. 이런 이유는 깨끗한 주위환경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단연코 물 때문이다. 이 마을 앞에는 성적골을 중심으로 맥반석이 깔린 산이 있다. 해서 물을 아무리 오래 두어도 이끼가 끼지 않으며 지하수를 나르는 파이프가 10년이 넘어도 녹이 슬지 않는다. 수질검사에서 최고등급을 받음은 물론 목포나 광주 등지에서 일부러 물을 가지러 오는 사람이 많다.

예전에 마을에는 깡샘이라 부르는 샘이 하나 있었는데 정월이면 이 샘물을 가져가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와 주민들 간의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감남골 밑에 정면 4칸 팔작지붕의 나주오씨 제각이 있다. 마을에 나주 오씨는 한가구도 살지 않으나 예전 나주 오씨가 세도를 부릴 때 맞춤했던 땅이었으며 그런 이유로 마을 주변에 오씨 소유의 산들이 많다. 또한 일반 가옥처럼 생긴 김해김씨 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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