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문화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內里는 몽탄면소재지에서 무안 방향으로 1㎞ 가량 가다 왼쪽으로 꺾어들면 만나는 지역으로 대치천을 바라보며 이루어졌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화산동 남촌 마산 연화촌 양동 호동 일부를 합하여 몽탄의 주산인 건지봉 안쪽이 되므로 내리라 이름 하였다. 본래 무안군 석진면인데 1939년 박곡면과 통합하여 몽탄면이라 하였다. 현재는 이청서씨 집성촌의 남천, 복합성씨의 화산, 인동장씨 집성촌의 양마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연궐정과 우공재 원모재 등의 제각이 있다.

▲ 연징산을 주산으로 한 화산마을

▲꽃 모양의 지형을 갖고 있는 마을

화산은 내2리에 속하는 마을로 공수동과 화산으로 이루어졌다. 화산에 대한 지명의 유래는 여러 가지로 추정되고 있다. 우선 마을유래지에는‘마을 형성시에 연징산에 분화구가 있다고 하여 火山으로 부르다가 후에 華山이라고도 불렀으나 현재는 花山으로 부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華山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집안의 족보에도 대부분 華山으로 표기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花山으로 써야 맞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문헌에 花山으로 표기되었다. 즉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석진면 花山里로,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석진면 花山洞으로 그리고 1917년의 자료엔 무안군 석진면 내리 花山洞으로 나온다. 두 번째는 마을의 풍수적 지형이 꽃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안의 제2봉인 연징산의 맥이 굽이쳐 내려오다가 이 마을에 이르러 살짝 갈무리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또한 마을에 있었다는 10여개의 고인돌은 꽃 수술에 해당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어 火山이나 華山보다 花山으로 써야 한다.

입향시조와 성씨자료에는 마을에 화순오씨 함평노씨 나주정씨 밀양박씨 등 여러 성씨들이 입향조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밀양 박씨를 제외하고는 족보를 확인할 수 없어 입향연대와 입향조를 추정할 수가 없다.
화순오씨 吳世魯(자-거첨)는 나주 거평에서 세거하였다. 喪을 당하여 인숙동 일심사 뒤편에 묘를 썼으나 스님들이 자주 불을 태우고 집까지 태우니 더 이상 살지 못하고 이 마을로 들어왔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교육에 열중하였다.

함평노씨 魯以貞(자-충항)은 나주 문평면 철곡에서 세거하였다. 공은 총명함이 뛰어났으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 정도이다. 시절은 비록 태평하였으나 장차 다가올 미래가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으킬 것을 알고 이곳으로 들어 와 자리를 잡았다.

나주정씨 鄭良信(자-부필, 호-애일헌)은 나주 투주동에서 세거하였다. 공은 뛰어난 학자이면서도 부귀와 공명을 탐하지 않고 단사표음의 자세로 자연을 즐기고 사랑하며 일생을 보냈다.

밀양박씨 朴 樑(1424-1465, 호-동계)은 황주 목사를 지낸 사대부 출신이다. 그런데 세조가 정변을 일으켜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면서 높은 벼슬에 있던 종조부와 아버지가 자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그도 관직을 내놓고 무안에 은거하면서 아이들을 지도했다. 처음 자리를 잡았던 곳은 법천사 주변의 원탑동이고 이어 공수동 옆 불낙골의 조박동에 살다가 이 마을로 들어왔다. 주민들은 함평노씨는 연화촌으로 화순오씨는 마을 뒤 서당뫼로 들어왔다고 한다.

▲쥐꼬리명당의 발복은 계속되고 있어

▲ 공수동 쥐꼬리명당
불낙골에 있는 曺朴洞은 조씨와 박씨가 살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마을회관이 있는 자리는 방앗간으로 사용했던 자리다. 지금도 당시의 흔적인 연자방아가 회관 앞에 놓여있다. 이 마을에는 해방이후 영암 장성 등 8개군의 빨찌산을 호령했던 빨찌산 대장 박량호가 살았던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큰 길은 원래 연징산 계곡에서 내려오는 시내가 복개되면서 형성된 길이다. 마을 앞에는 수령 400년으로 추정되는 당산나무가 있다. 둘레가 310센티미터 되는데 그 옆에는 석천이라 부르는 마을샘이 있다. 당산나무 주변에는 4개의 고인돌이 묻혀 있거나 방치되어 있다. 원래는 10개가 있었다고 하나 깨버리거나 쪼개 사용해버려 지금은 4개밖에 없다.

대치리와 내리에 있는 제각들은 총지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총지사가 폐찰되면서 기와는 마산의 연궐정으로 기둥은 한재의 월산사로 그리고 우공재나 원모재 등에도 총지사의 잔해를 이용해 건축했다고 한다. 특히 이 마을의 회관 앞에 있는 연자방아의 좌대는 총지사에서 가져온 돌이다.

이 마을엔 널리 알려진 명당터가 있다. 이른바 쥐꼬리명당으로 알려진 공수동의 이천서씨 묘역이다. 원래 保子孫之地였던 터에 서씨들이 쥐꼬리 모양의 둔덕을 만들면서 형성된 이 명당은 근래 들어 발복이 계속되고 있다. 제각 주변에 사는 주민의 말을 들어보면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아이들이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여기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부터는 몰라보게 공부를 잘하고 있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극도로 쇠약했던 자신의 몸도 모두 나아 이곳 땅의 기운 덕을 무한히 보고 있다고 자랑한다. 이곳에는 이천서씨 무안의 입향조인 정암 서숭로의 묘가 있으며 이천서씨 제각인 원모재가 자리하고 있다. 정면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제각이다.

마을 입구에 태양열 발전소가 있으며 그 오른쪽 골짜기를 남주골이라 한다. 살포쟁잇들은 마을 앞 들이다. 살포쟁이라 이름 붙인 것은 원래 대치천이 곡선으로 흐르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에 화산가라는 마을노래가 전해오고 있다. 작가가 명확치 않은 노래인데 마을 청년들의 기상을 나타내는 노래다. 일제강점기 때 이 마을에는 화산간이학교라는 학습터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불려진 노래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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