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문화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편집자주>

馬山里는 현경면소재지에서 해제 쪽으로 9㎞정도 떨어진 현경-해제 간 일반국도 옆에 위치하고 있다. 마산리의 행정구역 변천과정을 보면 조선 중기의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다경면 마산리, 외마산리, 내마산리로 나온다. 이어 목포부 다경면으로 바뀌고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무안군 다경면 마산리로 나온다. 현재의 행정 구역명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신기동을 합하여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된 것이며 마산과 신기 두 마을로 이루어졌다. 말을 길렀다는 방마골과 초장골이 있으며 대대로 文脈이 끊이질 않고 이어져 온 지역이다.

▲ 신기마을 전경

■나주 정씨가 새터를 잡아 이룩한 마을

▲ 약천동 샘
신기는 마산2리에 속하는 마을로 처음 들어온 사람이 새롭게 터를 잡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로 마을유래지에는‘행주 기씨 기민연이 해남에 거주하다가 운남 연리를 거쳐 이곳으로 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의 의견은 다르다. 마을회관 앞 표지석에도 주민들과 같은 의견인데 300여년 전에 나주 정씨가 처음 들어 와 마을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실지로 행주기씨 후손의 도움을 얻어 기씨들의 입향연도를 보니 이 마을에 들어온 지 150여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약천동의 입향조인 광산김씨 김만동의 연대를 보면 1700년대 전후에 광산김씨가 이 마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나주 정씨의 족보를 볼 수 없어 주민들의 의견만을 참조하여 입향조를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자료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 함평현 다경면 신기리가 나오는데 이 마을을 나타내는지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1912년의 자료엔 무안군 다경면 신기동으로 1917년의 자료엔 현경면 마산리 신기동으로 나온다.

신기마을은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신기, 왼쪽에 약천동으로 이루어졌다. 약천동은 샘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가운데 있는 이 샘은 67, 68 년도 대 한해에도 마르지 않고 물이 넘쳐났던 샘이다. 약천이라 이름 붙인 것은 지나가던 스님이 이 물맛을 보고는‘장님도 눈을 뜰 만큼 약효를 지닌 물이다’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주민들이 약샘이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약천동은 광산김씨 입향조인 金萬東(숙종 代, 광산인. 호-둔암)이 들어와 자리잡은 마을이다. 마을 뒤 제각에 모셔지고 있는 김만동은 조선 중기 유명한 학자였던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었으며 우암 송시열과도 교분이 두터웠던 선비였다.

이 마을은 마산이라 부르는 뒷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옆으로는 계란산을 두고 있으며 앞으로는 덕유산과 그 너머 함해만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느껴지는 기운이 부드러운 것은 주민들의 말처럼 세 곳의 명당이 마을을 감싸고 있어서인 듯싶다. 뒷산에는 방구명당이 있으며 광산김씨 입향조의 묘가 있는 북쪽 부리의 삼역동 명당과 마을 입구의 수문새 잔등의 명당이 그것이다. 방구명당에는 나주 나씨가 이미 묘 자리를 잡고 있으며 주변이 마치 개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주민들은 뒷산을 암캐골이라 하고 맞은편의 용정 뒷산을 수캐골이라 부른다. 암캐골에는 옹달샘이 있는데 사시사철 마른 적이 없다고 한다. 삼역동 앞의 바다를 새목개라고도 한다.

■주민의 날을 제정한 마을

▲ 마을 주민들과 대화
이 마을은 2003년 친환경 최우수 마을과 이후 장수마을 등으로 선정될 정도로 주민들이 한마음으로 마을 가꾸기에 나섰으며 건강을 가꾸기 위한 주변 환경이 좋은 마을이다. 다른 마을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마을의 단합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마을회관 앞의 게이트볼 장과 마을 입구의 소공원이 그것이다. 또한 이 마을의 부녀회는 단연 자랑거리이다. 부녀회에서는 폐비닐과 폐품을 모아 자원재활용 경진대회에서 5-6년 동안 계속 1등을 차지해 그 상금으로 경로잔치를 비롯해 마을 발전에 상당 부분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주변 마을과는 다르게 주민의 날을 제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매년 음력 2월 1일에 지내는데 이때는 모든 주민들이 나와서 하루를 즐기며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친목을 도모한다. 주민들은 모두 부지런해 사시사철 농한기가 없으며 마을 공동재산이 많이 있다.

마을 앞에는 간척으로 형성된 농지가 있다. 새언안이라고 부르는 둑은 일제강점기 때 막았는데 이 둑으로 인하여 온통 밭뿐인 마을에 논이 조성돼 그때부터 주민들이 여유롭게 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악행을 행하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산 교훈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마을에 장님이 되어 홀로 사신 분이 있었다. 이 분은 3세 때 원인 모를 병으로 장님이 되었는데 이 분의 모친이 워낙 나쁜 일을 많이 해 자식이 벌을 받은 결과라고 주민들은 믿고 있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그 분이 별세할 때까지 밥이며 옷 등을 주었으며 죽어서는 장례식을 치러주기까지 했다.

약천동 마을 뒤에는 연강재라 부르는 광산김씨 제각이 있다. 삼문이 있으며 1947년에 지었다. 팔작지붕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삼문 앞에는 약천동 마을 입향조인 김만동의 표지석이 서 있다.  

마을에는 심헌전주이공유허비와 효부무안박씨기행비, 그리고 송원기정도공적비가 있다. 또한 목포대학교 박물관의 자료에 따르면 마을 남동쪽 두 군데에서 적갈색연질토기편, 회백색연질토기편 등이 발견되었고, 약천동 마을 뒤 두 군데에서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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