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

 

지역의 역사, 문화 포장 잘하면 매력적인 관광자원

21세기 들어 관광자원이 빈약한 지자체들이 흥미로운 스토리 발굴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가져오면서 새로운 관광지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지금까지 관광지는 천혜의 절경이나 과거의 문화, 사적지 등 볼거리에 치중, 관광지 주변 부대시설에 역점을 두어 왔다. 곧 과거의 원형만 가지고 관광지로 삼아 왔을 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 사람들은 미래 후손을 위한 역사 관광지 개발에는 인색하다는 지적이다.

요즘 전설이나 민담을 새로 꾸며 스토리텔링(storytelling, 이야기)으로 거듭난 무형 관광산업이 급부상하고 있다. 스토리텔링은 사실에 기초한 이야기와 상상의 이야기로 관광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기법으로 역사, 전설, 문학 및 예술작품, 인물, 영화, 드라마, 사건, 자연 등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재미있게 해설함으로써 관광객에게 감동을 주는 새로운 포장 관광 술이다.

롤프 옌센의 책‘드림 소사이어티’에서는 미래의 전쟁은 콘텐츠 전쟁으로 인터넷을 통해 정보의 독점이 불가능해진 네트워크 사회에서‘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니라‘멋진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자’가 시장을 지배한다고 했다. 때문에 경쟁력 있는 관광자원이 없는 지자체는 스토리텔링 개발에 나설 필요가 있다.

이에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이 번호부터 연재한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문화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歸鶴里는 몽탄면 소재지에서 815번 지방도로를 타고 일로 쪽으로 1㎞ 쯤 가다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나오는 지역으로 길 입구에서부터 귀래촌 연동 적동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서해안 고속도로가 마을 입구를 지나고 있어 예전의 아늑한 풍광과는 조금 다르다.

1912년의 자료에 무안군 박곡면 귀래촌 내동 (입석리) 연동 학봉정 등으로 나온다. 이후 1917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박곡면 귀학리 귀래촌 연동 내동 등으로 나온다. 현재 귀래촌과 적동 그리고 연동의 세 개 마을로 이루어진 귀학리는 귀래촌의 귀와 학봉정의 학의 이름을 따서 귀학리라 하였으며 박곡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귀학저수지와 영사재 그리고 당산나무가 있다.

■연동은 이천 서씨 마을

귀학리는 귀래촌 연동(가연동이라고도 함) 적동 마을을 포함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 법정리 하나로 이루어졌다.

문헌이나 자료에 적동이란 지명은 없다. 하지만 위치로 봐서나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문헌에 나와 있는 지명인 내동이 곧 적동으로 보인다. 적동은 원래 문씨들의 터였다. 하지만 현재 문씨들은 한 세대도 없고 채씨와 이씨 박씨 김씨들이 살고 있다. 마을유래지에서는‘입향조는 김해김씨 김효희로 무오사화(1498년) 때 화를 피해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마을에 들어왔다.’고 보고 있다. 입향조가 심었다는 당산나무가 마을 아래에 있으며 마을 주변에는 커다란 고총들이 많이 있다.

연동은 이천 서씨 마을이다. 무안에 이천서씨 입향조는 쥐꼬리명당이라 부르는 곳에 있는 재각의 주인인 서숭로(1422 - ?, 자-대수, 호-正巖)이다. 서숭로는 세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큰 아들인 의손(1471-1544, 자-충여, 호-진일제)이 이 마을에 정착했다. 의손은 효성이 지극할 뿐 아니라 천성이 순수하고 근면성실해 주변의 칭송이 자자했던 사람이다.

귀래촌은 움푹 들어간 지형의 특성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주민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원래 구레라 불러 왔다고 한다. 왜냐하면 풍수적으로 뱃구레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봤기 때문이다. 뱃구레는 여물을 먹을 때는 불룩하지만 배설하면은 훌쭉해지기 때문에 현재의 마을 현상과 견주어 이야기 한다. 즉 예전에는 부자가 많았지만 지금은 마을이 가난하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구레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지금의 귀래촌으로 표기한 것이다. 언제 누구에 의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지 모르지만 정씨와 박씨들이 많이 살았다.

■서해안고속도로 공사 때 나온 450년 전 유물, 지금도 보관하고 있어

적동 뒤에는 삵(살쾡이)봉이 있고 연동 뒤에는 한새봉이 있으며 귀래촌 뒤에는 병대산이 자리하고 있다. 삵봉 옆에는 주민들이 의미를 두고 귀하게 여기고 있는 매봉산(서씨 재각이나 서씨 족보에서는 鷄峰山으로 나온다)이 있다. 이 산은 날이 가물 때 인근 주민들이 모여서 기우제를 지내는 산이기도 하다. 삵봉은 중턱에 살쾡이가 사는 굴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한새봉은 큰 새의 형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어 병대산은 무슨 목적으로 주둔했는지는 모르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대가 있었던 산이다. 병대산 정상에는 막사와 우물이 있으며 기관포를 장착했던 시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해안 고속도로가 나면서 산은 없어졌다.

이곳에 승달산의 명당인 노승예불형의 혈지가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인지 일본인이 한국의 혈맥을 자르기 위해서 박았다는 쇠말뚝이 두 군데나 있다고 하며 맥을 끊기 위해 뜸을 뜨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고 있으며 단순히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그렇다는 것이다.

마을 입구에는 독배기라 부르는 곳이 있다. 얼마 전까지 이곳엔 쌍독으로 불렀던 커다란 돌이 두 개 서 있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마을 앞까지 영산강 물이 들어올 때 이 독에 배를 매었다고 한다. 도로공사 때 없어졌다.

적동 마을 아래에 아네미라 부르는 곳엔 당산나무가 있다. 원래는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 두 개의 당산이 있었는데 할아버지 당산은 고사되어 고목이 되어 남아있고 할머니 당산만 살아있다. 두 당산 둘레가 모두 460mm가 넘는 오래된 나무들이다. 적동 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정월보름이면 이곳에서 당산제를 모시며 마을의 평안과 일년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고 있다. 할아버지 당산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다. 주민들은 마을의 입향조가 심은 나무로 믿고 있다.

한때 이 마을엔 농악이 유명했다. 귀학농악이라 하면 인근에서 알아 줄 정도로 그 실력을 인정받았는데 잔치 때나 행사 때면 출장 가서 농악놀이를 하곤 했다. 또한 주변 마을에 비해서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 와 살고 있다. 해서 자연단위 마을로는 드물게 초등학생이 10명이나 되기도 한다.

고인돌이 몇 기 있었으나 경지정리 하면서 깨버리거나 파묻어 버려 지금은 없다.

마을 입구에 이천 서씨 재각인 영사재가 있다. 정면 사칸에 팔작지붕의 형태인 이 재각은 주련이 5개나 걸렸다. 안에는 6개의 현판이 있으며 이천 서씨 파조인 徐 稜의 영정이 걸려있다. 또한 서해안 고속도로 공사 시 문중의 묘가 파묘되면서 나왔던 짚신과 시신을 쌓던 천[과두]과 삼베 조각이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 묘의 주인은 연동 마을 입향조인 서의손의 아들 서철주(1496-1557)이다. 영사재 아래 터는 일제강점기 때 박곡면사무소가 있었던 곳이다.

마을 주변의 명칭을 살펴보면 텃골 살막쟁이 고래실 아네미 간데미 샘골 비석등 지네정골 고조골 진등 진득골 거문달 큰골 작은골 배나무골 지네밭골 당산등 작은매장골 큰매장골 적밭 서반정 어(애)갯재 작은애개 대파리골 가장골 건넌골 솔짐개 범성골 맞추쟁이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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