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문화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편집자주>

萬豊里는 해제면소재지로부터 동북쪽으로 4㎞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고려청자가 발견되어 사적지로 지정된 도리포로 가는 길목에 있다. 또한 만풍리 곳곳에서 도굴꾼들의 도굴 흔적을 발견할 만큼 고총과 유물산포지가 많다. 니성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동북쪽이 함해만에 접해 있을 뿐 아니라 지리적인 영향으로 염전이 많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풍리, 신덕리, 진목동, 신만동, 심양리를 합하여 신만동과 신풍리의 이름을 따서 만풍리라 하였다. 원래는 신만, 진목, 신풍, 노문래 4개 마을이었지만 현재는 신만, 진목, 신풍, 노문래, 심양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 신풍마을 전경


■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마을

▲ 주민과의 대화
신풍은 만풍3리에 속한 마을로 아래덤 윗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덤은 민머리, 신덕으로 불렸으며 윗덤은 신풍으로 불려졌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신풍으로 불린다. 新豊의 유래는 여러 물산이 풍부하게 생산되어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실지로 예전부터 이 마을은 소금 쌀 나무 등이 다른 지역보다 많이 생산되었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자리잡은 성씨는 남양 홍씨이나 지금은 한 세대도 없다. 얼마 전까지 마을에 홍씨들의 흔적인 묘가 있었으나 이제는 그마저 없다. 이후에 들어온 성씨가 아래덤은 함평 대동에서 온 광산김씨 김태열(자-열지, 1738-1776)이 들어왔고, 윗덤은 나주 다시 동당에서 온 하동정씨 정달득(자-통여, 1752-1793)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자료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 함평현 해제 신풍리가 나온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에도 무안군 해제면 신풍리로 1917년의 자료엔 무안군 해제면 만풍리 신풍으로 나온다.

마을은 봉산(부엉산, 부흥산으로도 불림)과 죽방산(쭉방산)을 뒤로하고 앞은 둔대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봉산은 마을의 주산으로 예전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나 현재는 조그만 나무들과 잡목이 자라고 있다. 산 정상에는 호랑이를 닮은 바위가 있어 범바위 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이 산에는 지네머리와 누에머리의 지형이 있어 명당터를 안고 있는 산으로 알려졌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산의 모양이 부엉이를 닮았을 뿐 아니라 새들의 번식도 다른 마을이 아닌 이 마을 숲에서만 했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저수지가 있다.

마을 앞들인 둔대들에 대한 두 가지 지명 유래가 있다.

하나는 풍수적 지형에서 나온 말인데 만풍리를 감싸고 있는 니성산의 줄기에 해제 8명당의 하나로 부르는 천마시풍의 맥이 흐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천마시풍의 혈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 그 말[馬]을 찾아 들판에서 둘레둘레 찾아보았다고 해서 둔대라고 했다 한다.

다른 하나는 한자로 屯隊라고도 쓰는데 영광에서 도리포로 건너 온 장군이 함께 온 군사들을 이 뜰에서 머물게 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벼락바위 전설과 지네머리 전설

▲ 샘골의 샘
샘골이라 부르는 곳에 샘이 있다. 지하수가 개발되기 전에는 만풍리의 다른 마을에서도 모두 이 샘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할 뿐만 아니라 물맛도 뛰어나 이 마을 뿐 아니라 주변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샘이다. 주민들은 정월보름이면 이 샘물을 지키기 위해 마을의 온 부녀자가 나서기도 했는데 이른바■물 타러 간다■는 민속놀이의 한 형태다. 그래서 그런지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쌀은 그 맛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토질이 비옥하고 벼가 자라는 알맞은 기후에 물이 좋아 米質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는 두 개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죽방산의 벼락바위전설이고 다른 하나는 봉산의 지네머리 전설이다. 예전에는 마을에서 2월 초하루에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크게 지냈다. 주염나무인 당산 하네와 당산 할멈(둘레 2미터 30)이 있어서 샘굿을 비롯해 거리굿까지 지냈으나 당산하네가 바람에 쓰러지고 마을에 사람이 없으면서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주민들 중 의병활동을 하다가 죽은 사람도 있다. 또한 한국전쟁 기간에는 북한군에게 부역했다는 잘못된 정황을 믿고 경찰에 의해서 이 마을 주민을 포함한 만풍리 송계리 주민 7명이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다행히 희생자의 후손들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신청해 고인들이 억울하게 죽었음을 밝혀냈다. 후손들은 고인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마을 뒤에는 군에서 보조를 받아 설치한 하동정씨 가족묘가 있다.

목포대학교 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신풍저수지를 지나 남쪽으로 2㎞ 떨어진 지점에 신풍석실분 2기가 발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발견 당시 이미 도굴꾼에 의해 봉분이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수습된 유물은 철도자와 토기편들이다. 또한 범바위산의 큰 구렁골 등 두 군데서 신풍유물산포지가 발견되었다. 모두 바다와 접해 있는 지역이며 현재는 모두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회청색과 회백색경질토기편이 발견되었다. 죽방산 아래에는 점등 또는 사기점이라 하는 도요지가 있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봉산과 죽방산 사이에 있는 쭉뱅이 고개, 마을에서 입석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샛잔등이 있으며 안마실 배다리 절터골 큰구렁골 곱은치 그리고 목화 등 물산을 배로 실어 날랐던 미영퉁바위 등이 있다.

마을에는 1972년에 세운 노촌임공임노춘(1893-1950)유적비와 1982년에 세운 열부금령김씨(1902-1982)기행비가 있다. 또한 하동정씨세덕비와 광산김씨세덕비가 있으며 최근에 세운 듯한 하동정씨부부쌍효기적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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