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문화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芝山里는 삼향면소재지에서 5㎞ 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남으로는 목포시, 북으로는 몽탄면과 청계면을 접하고 있다. 제1저수지와 제2저수지가 있어 풍부한 용수를 갖고 있으며 국도1호선이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다.

또한 간척사업으로 인해 농경지도 풍부하다. 본래 나주군 삼향면의 지역으로 지산, 지산동이라 하였는데 1895년에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곡동, 월해동, 월호동, 복룡동과 곽단동 대치동의 각 일부와 일서면의 대치 일부를 합하여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복룡, 지산, 곽단, 월호, 노재동, 장곡 등 6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봉수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예전부터 이곳에 芝草가 많아 芝山이라 했다. 군부대와 농공단지가 있다.

■ 가구마다 부자가 되라는 마을

노재동은 지산5리에 속하는 마을로 1991년 지산1리 복룡 마을에서 분리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지산군부대가 들어오고 삼향농공단지가 형성되면서 인구가 늘어 나눈 것이다. 마을은 진등이라고 불렀던 삼향공단길 아래에 자리 잡고 있으며 봉수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또한 마을 옆으로는 국도 1호선이 지나고 마을 앞에는 월호 마을 뒷산인 매봉이 자리하고 있다.

처음 마을이 형성된 것은 1968년 양홍관씨가 터를 잡으면서다. 이후 점차 세대수가 늘어나게 되었는데 최초의 입향조는 1978년 전주 이씨 이광로씨이다. 그러다 1980년도에 13채의 취락구조 사업이 본격화 되면서 점차 마을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마을 이름인 路財洞은 진등 아래의 마을로 가구마다 부자가 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마을에는 두 개의 교회를 비롯한 지산군부대와 삼향농공단지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군부대는 1967년부터 터를 닦은 후 목포에 있는 부대가 옮겨온 것이다. 농공단지는 1984년에 터를 닦기 시작하여 1986년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특별농공단지로 시작했으나 현재는 일반농공단지이다.

신생 마을이어서 그럴듯한 전통이나 문화는 없지만 주민들의 단합과 화합이 잘 되고 있다. 특히 노인회를 중심으로 한 솔선수범 실천은 주민들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부녀회는 경로효친의 지극함을 보여주고 있어 다른 마을의 본이 되고 있다. 마을에는 농경지가 적지만 마을 경제나 주민들의 생활은 어느 마을 못지않게 여유롭다. 왜냐하면 마을의 구성원 중 상당수가 정년퇴직자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민들 60여명 중 42명이 노인일 정도로 노인 비중이 높은 마을이기도 하다. 특히 80세 이상의 노인이 6명이나 있어 장수 마을을 꿈꾸기도 한다.

■ 농공단지와 군부대는 주민에게 불편만 줘

마을에 들어있는 군부대와 농공단지는 주민들과 소통과 교류가 되지 않아 마을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군부대는 처음에는 주민과의 사이가 매우 좋았다. 군인들이 반상회 뿐 아니라 마을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주민들과 소통이 되지 않더니 지금은 아예 단절이 된 상태다. 농공단지도 그렇다. 주민들의 소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지하수 물길이 끊어지고 공장의 소음까지 안겨 줘 불만이 많다.

주민 중에는 한국 전쟁 중 인천 상륙작전을 가능하게 했던 월미도 전투의 영웅이 있다. 이용춘(85세)옹으로 당시 월미도 작전의 정보 책임자였다. 지금도 마을의 대소사를 챙기고 있으며 무공훈장이 두 개나 있다.

▲ 말바위와 범바위가 있었던 자리
국도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의 맞은편 돌무더기를 돌마산이라 하며 이 바위와 마주보고 있는 곳에 범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국도 1호선이 나기 전에는 바위의 모습이 말의 형국을 하고 있었는데 길이 나면서 현재는 그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그 외에 거북 바위, 말 바위, 할매 바위 등이 있다. 또한 바위가 네 개가 있다 해서 너바위(네바위)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마을 뒤 골짜기를 각골이라 하며 왕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각골재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 입구 군부대 주변을 민드래미재 또는 은드래미재라고 부른다. 주민들 말로는 은드래미재라고 한 것은 그곳에 銀 서말이 묻혀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전쟁 때는 많은 사람들이 총살을 당했던 현장이며 공동묘지 터여서 부대가 들어오기 전에는 한낮에도 주민들이 다니기 꺼려했던 곳이다. 군부대 위에는 절터가 있었는데 지금도 석축과 기와장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장군이 살았다는 장군터도 있었으나 현재는 공단 부지에 편입되었다.

이 마을에는 특이한 이름의 언덕이 있다 이른바‘탕심’이라는 언덕인데 광-목간의 큰 도로가 나기 이전에 무안 쪽에서 이 마을에 들어올 때는 반드시 거쳐서 들어오는 언덕이었다. 예전에는 무당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라고도 한다. 이름의 유래를 아는 사람이 없고 마을 아주머니들이 이 마을에 시집올 때 거쳐오는 언덕이란 증언을 종합해 보면 한숨의 언덕이 아니었는가 여겨진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시집올 때는 나름대로 기대를 갖고 오기 마련인데 월호마을로 시집오는 여자들은 마을이 훤히 보이는 이 언덕에 들어섰을 때 갯가 궁벽한 모습의 마을을 보고 부푼 기대가 무참히 깨져버리고 한숨[嘆心]만 나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한다. 嘆心은 탄식하는 마음, 한탄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단어로써 전라도 특히 이곳 서남부 지역의 발음 현상을 볼 때 탄심이 탕심으로 바뀌어지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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