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社倉里는 몽탄면 소재지로부터 동북쪽으로 약 4㎞ 가량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우명산을 중심으로 자리잡은 사창리는 다른 지역보다 고대의 유물과 유적이 많이 발견되는 곳이다. 특히 고인돌과 석곽묘 및 옹관묘는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재조명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원사창, 저두, 덕암, 초당산, 사동 마을로 이루어 졌으며 본래 무안군 석진면 지역이다. 조선 중종 때 곡물대여기관인 社倉이 있었으므로 사창이라 했다. 1910년 목포부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저두리, 덕암리, 상주교, 용산, 사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시켰다. 1932년에 박곡면에 편입되고 1939년에 몽탄면으로 개칭되었다. 북적포와 덕보포 두 개의 포구가 있으며 무안읍 성암리 제봉산에서 발원하는 덕암천이 있다.

▲ 몽탄 덕암마을 전경

▲ 독보-덕보-독암-덕암으로 변한 마을이름

덕암이란 지명의 유래를 마을유래지에선‘입향조가 이곳의 지형이 덕이 있는 형국으로 보아 이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그런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대화 중에 대부분의 주민이 앞산인 남박산에 있는 2층 바위가 덕이 있어 보여 덕암이라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바위는 마을에서 보이지 않는 산 너머에 있다.

지명 유래에 대해 여러 가지로 추정해 생각해 보면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고인돌과 관련이 있다. 주변 마을인 두암 마을은 7개의 고인돌이 말 형국으로 형성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도 목포대학교 자료에 따르면 마을 입구에는 4기의 고인돌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바위들이 주민들의 생활에 많은 도움을 줘 덕암이라 하지 않았나 추정해볼 수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고인돌을 본적이 없다고 한다.

또 하나는 덕보산과 관련이 있다. 예전에 이곳은 포구가 있었다. 이 포구는 주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줬는데 포구의 바람을 막아주는 산이 독으로 이루어진 독보산으로 이것이 변하여 지금의 덕보산이 되었다. 마을의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즉  독바위의 의미인 독암에서 덕암으로 변하지 않았는가 생각해 볼 수 있다. 문헌을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석진면 덕암리로,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석진면 덕암리로, 1917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석진면 사창리 덕암으로 나온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함양박씨 朴光欽(자-사진, 1721-1765)이다. 광흠은 담양군 창평면 절산에서 세거하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곳으로 이거하였다. 그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셋째는 성균관 진사시에 이등으로 합격한 재원이었다. 후일 그의 처가인 양장1리 도림산 마을에 솔대배미를 세워 기념하였다고 한다. 또한 대대로 학식과 덕망을 갖춘 후손들이 가문을 빛내 왔다. 마을유래지에는 함양 박씨보다 조금 늦게 나주김씨 김주현이 이웃 마을 사창에서 들어왔으며 제주양씨는 1880년경에 양경묵이 나주 공산면에서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롱정
▲두 개의 포구를 안고 있다

이 마을은 8개의 봉우리와 4개 들이 함께하는 마을로 영산강 가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을 멀리서 보면 들판에 숲으로 우거진 독특한 형국이다. 우명산의 맥을 이어 마을의 주산을 이루고 있는 제장대를 비롯하여 시글덕산 북지기 몰뫼등이 마을의 병풍 역할을 하고 남박산 소래산 앞동산 덕보산이 안산을 이루고 있다. 4개의 들은 토기동들 앞들 뒷들 방죽들이다.   

제장대는 높지는 않은 산이나 가뭄이 들 때면 무제를 지냈던 의미 있는 산이다. 남박산은 2층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있으며 그곳에서 임진왜란 때 댕구(포)를 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언뜻 보면 평범한 바위이고 별 특징이 없어 보이는데 주민들에겐 의미 있는 특별한 바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월보름에는 부녀자들이 이곳 남박산에 모여 강강수월래를 불렀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영산강 건너 맞은편에 나주시 동강면 월송리가 있는데 그곳에도 비슷한 바위가 있어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국이라 한다.

소래산은 유물이 많이 발견되는 곳이다. 50여 년 전에 큰 홍수가 있었는데 소래산의 흙이 쓸려 나가면서 묻혀져 있던 고분이 발견돼 생활도구 등 많은 부장품들이 발견되었다. 소래산 아래에는 북적포라는 유명한 포구가 있다. 北赤浦는 영산강을 도강하여 나주 동강면과 통하는 도선장이다.

德甫浦는 덕보산 아래에 있는 포구이다. 덕암천과 영산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는 양수장공사가 진행중이다. 영산강의 물을 양수하여 해제를 비롯한 무안군 일부와 신안군의 지도읍까지 농업 용수를 공급하는 것이다. 원래 독으로 쌓여진 보 즉 독보라는 의미를 지녔으나 나중에 덕보로 바뀌어진 경우다.

마을 옆에 배롱정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예전에 배롱나무가 우거져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그 아래 농지에서 붉은 빛을 띤 광물인 朱土가 발견되었다. 朱土는 石間 그림이나 陶器를 만들 때 염료로 쓰거나 또는 朱草를 쓸 때 이용하는 원료이다. 오래 전에 이 마을을 주토계라 부른 이유가 이 흙이 나왔기 때문이다. 현재 배롱나무는 없고 대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그 앞에 제주 양씨비가 세 개나 있다.

동학유족이 있어

발굴이 진행 중인 덕암고분
이 마을은 몽탄면에서는 유일하게, 그리고 무안군에서는 드물게 군내버스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다. 주민들이 무안군을 비롯한 여서 기관에 청원을 하였으나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제는 마을길 포장과 더불어 대중교통수단의 확보가 주민들의 숙원사업이 되었다. 이 마을은 달래의 주산지로 주민들에게 높은 소득을 올려주고 있다.

동학의 흔적을 발견했다. 주민들에겐 동복양반이라 불렸던 제주 양씨 양회순이다. 후손인 김우례씨(76세)의 말에 따르면‘할아버지는 나주까지 말 타고 다니면서 동학 활동을 하였으며 후일 무안읍 만창에서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가족들이 시체는 찾지 못하였으며 고인의 비문에는 동학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의병활동으로 죽었단 사실만 적혀져 있다. 

마을회관 앞에 쌍샘이라 부르는 두 개의 샘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마을 입구 요골이라 부르는 곳에 몰무덤 두기가 있는데 요즈음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다. 이곳에서 지난 8월부터 발굴 작업을 하고 있는 대한문화유산연구센터에 따르면 덕암고분은 남분과 북분으로 구성돼 있고 남분에서 3기, 북분에서 8기의 옹관묘가 발견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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