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九老里는 청계면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4㎞ 떨어진 곳에 있으며 청계만을 마주하고 있다. 갈마봉(상곡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나주 정씨의 동족마을이다. 서쪽으로는 간척으로 인한 농경지가 조성되어 있고 관동제와 망산제로부터 농업용수를 공급 받고 있다. 본래 무안군 일서면의 지역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 관동 코제이 벽해동을 합하여 청계면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구로동과 관동 2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폐교된 구남분교가 있으며 나주정씨의 제각인 영모재와 금성나씨열부비각 그리고 선돌 2기와 고인돌이 많이 발견된다.

▲ 관동마을 전경

벼슬아치가 살았던 마을

▲ 마을 입구 선돌
관동은 구로2리에 속한 마을로 원래 고성이씨 등 여러 성씨들이 살았으나 현재는 나주 정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정수삼(자-자오, 호-경암, 1823-1889)이다. 족보를 보면‘옆 마을인 구로에서 살다가 주변 환경이 수려하고 군자가 가히 살만한 곳이라 여겨 이 마을에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경암처사 비에는 1868년에 들어왔다고 표기되어 있다. 공은 박학다식하여 모르는 것이 없어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다.

그의 묘는 삼향면 지산리의 이른바 돌마산이라 부르는 곳에 있는데 후손들이 이장하려고 묘를 파보니 그곳에서 杜思忠이라는 명패가 나왔다고 한다. 두사충은 명나라 장수로 임진왜란 때 明軍의 선봉장을 했던 사람인데 왜란이 끝나도 돌아가지 않고 귀화하여 대구에서 산 사람이다. 그는 풍수지리에 밝아 전국의 산을 돌아다니며 명당자리에다 자기의 이름을 새긴 명패를 묻었다고 한다. 그 명당 중의 하나가 이 마을의 입향조가 묻혔던 자리이다. 지금도 마을 주민이 그 명패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관동이란 마을이름은 마을유래지에는 관아 터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마을의 위치상 관아가 들어설 자리가 아니고 무안역사상 청계면에 관아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관아가 있었다면 관련된 지명이 있거나 송덕비 등이 있었을 텐데 이러한 지명이나 흔적들이 없다. 남아있는 지명으로는 활을 쏘았다는 사장등과 사또자리 정도인데 그것을 가지고 관아가 있었다고 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다.

문헌을 살펴보면 마을 이름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고 1912년의 조선면리동일람에는 官洞이라 표기했다. 이렇게 봤을 때 벼슬아치가 살았다는 곳이 아닌가 여겨진다. 나주정씨가 들어오기 전에 고성이씨 중 진사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나왔다는 이야기나 나주정씨들도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이 나왔다는 것을 보았을 때 또한 마을의 주산인 갈마봉이 부사산이라 일컬어지는 것을 봤을 때 館洞보다는 官洞의 의미가 맞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지금의 館洞 표기는 1917년의 자료부터 나온다.

많은 인물이 배출된 마을

▲ 동산의 고인돌
이 마을은 부사산 또는 상곡봉이라 부르는 갈마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좌로는 동산이 있으며 우로는 가란봉, 그리고 마을 앞으로는 청계만이 펼쳐져 있다. 동산에서 10기의 고인돌을 확인했으나 자료에는 13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민들이 동산 바우라고도 부르는 고인돌은 갈마봉에서 동산으로 내려오는 줄기에 많이 있었으나 밭을 개간하면서 깨버리거나 가져가 버려 지금은 동산에만 남아있다. 대체로 고인돌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큰 것은 길이가 4미터50이 넘기도 한다. 또한 주변에서 돌칼 돌도끼 등이 발견됐다고 기록되었으나 주민들은 몰랐다.

마을에 두 기의 선돌이 있다. 마을회관 앞에 있는 선돌은 예전 아름드리가 넘는 당산나무가 있었던 자리다. 그곳에서 주민들은 제상을 차리고 당제를 모시기도 하였으나 70여년 전에 태풍이 불면서 넘어져 죽고 난 뒤에는 당산제를 지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선돌을 세우고 마을 입구에도 선돌을 세워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했다. 마을 입구의 선돌에는 신사년 10월이라고 각이 되어있다.

이 마을에는 마을 단위로는 드물게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같은 동족 마을인 구로동 마을이 경제에 힘썼다고 한다면 이 마을은 교육에 힘써 두 사람의 면장과 전남병무청장 제주 항만청장 그리고 사법고시 합격자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마을에 아픈 일도 있었다. 오래 전에 주민들이 마을 앞 대섬 주변에서 굴을 채취하다가 배가 뒤집혀 많은 사람들이 참변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주민들이 기름진 청계만 어장을 외면해 바다에 나가 수산물을 채취하는 것을 싫어했다.

몰무덤 잔등이라 부르는 곳이 마을에서 벽해동으로 넘어가는 능선에 있다. 또한 가란봉 밑에 설욱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곳에는 아름드리의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 오래 전에 솔잎 혹파리병이 널리 퍼지자 예방 차원에서 마을에서 소나무들을 베어버렸다. 후에 소나무 베어낼 때 주도적으로 나섰던 마을 이장이 변을 당하자 주민들은 소나무를 베어버렸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갈마봉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자손들이 없던 부인들이 이 바위에서 기도하면 자손을 얻는다고 하여 많은 부인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남자의 생식기 모습이며 이 바위에서 기도를 하고 물을 마시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 바위에서 나오는 물은 태산 붕알 치료에 즉효였다고 한다. 태산 붕알이란 고환이 커진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곳의 물은 솜으로 찍어 바를 수 있을 정도로 조금밖에 나지 않는다.

코제이 라는 지명이 있다. 마을 앞 바닷가에 있는데 오래 전에 러시아 선원이 그곳에서 쉬어 간이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봤던 러시아인의 커다란 코를 보고 주민들이 붙인 이름이다. 그곳에서 잔등을 넘으면 갈룡동이 나온다. 주변에는 묘가 많이 있다. 그 외에 선창터 묘골 망불재 간대정 수랑골 병목아지 등이 있다. 병목아지는 구로리 1번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고인돌이 있다.

저작권자 © 무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