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문화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편집자주>

淸溪里는 청계면 소재지에서 목포 방면으로 1㎞ 가량 떨어져 있다.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이 지나고 있으며 태봉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淸溪' 라는 이름의 유래는 승달산에서 발원하여 원청계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는 시내인 '淸溪川' 이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깨끗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무안군 일서면 지역이었고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는 행림리 구암리 학유정리 가시동리 당치 중신기를 합하여 청계리라 해서 청계면에 편입하였다. 원래는 원청계 행림 학유정 구암 등으로 이루어졌으나 현재는 원청계 구암 장부교 학유정 등으로 이루어졌다.

■학이 놀고 있는 형상의 마을

▲ 동산처럼 보이는 곳이 떡바위다.
학유정은 청계4리에 속한 마을로 마을의 지형이 학이 먹이를 찾아 놀고 있는 형상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마을 중간에 해남윤씨 묘가 있었는데 그 묘를 둘러싸고 12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 소나무에는 해마다 수많은 학들이 놀러 왔으며 마을 사람들도 유복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60여년 전에 해남 윤씨들이 그 소나무들을 베어 팔아버렸다. 그러자 그때부터 마을에는 안 좋은 일이 잇달아 일어났으며 젊은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죽거나 다치는 등 변을 당하고 마을에도 우환이 계속적으로 일어났다고 한다. 현재는 윤씨 묘도 없다. 4년 전에 파묘하여 납골당에 안치했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나주 정씨다.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효종 때 나주정씨 정도하가 최초로 입향 하였으며 그 후 나주김씨 김용규가 이거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훨씬 이전에 마을이 형성되고 주민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이 마을은 영진포라는 큰 포구였으며 조선시대 이전에도 배들의 왕래가 잦았기 때문이다.

마을 이름에 대한 문헌을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 무안군 일서면 鶴遊亭으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 일서면 학유정으로 그리고 1917년의 자료에도 청계면 청계리 학유정으로 나온다.

현재 이 마을은 두 차례의 간척(1910년대와 1970년대)으로 넓은 농지를 갖고 있지만 조선조 말까지도 마을 앞은 바다였다. 내륙으로 깊숙이 구암 마을까지 들어온 지형적인 영향으로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천혜의 포구가 형성되었다. 포구는 마을 서쪽 끝 갯고랑 부근이었으며 이를 통하여 해적들이 들어오기도 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영나리라 해서 대수롭지 않은 포구로 생각하고 있지만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 포구를 통하여 중국의 사신 왕래가 자주 있었으며 벼 2-3천 석을 실은 배가 드나들었다 한다. 뿐만 아니라 이 포구를 관할하기 위하여 통정관이라는 관리가 있었으며 그가 살았던 곳을 예전에는 통정골이라 불렀으나 현재는 통사골이라 부른다. 안타깝게도 주민들은 이러한 마을의 역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소타령[牛歌]을 불렀던 마을

▲ 90세 할머니가 소타령을 부르고 있다.
통정골은 학유정과 가시동 마을 사이에 있다. 예전에 이 통정골에는 140호가 넘는 주민들이 살았다고 한다.

이곳에는 석각으로 된 통정샘이 있으며 지금도 샘 주위를 파보면 기와와 통나무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자료에는 고려자기도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통정골이 현재의 통사골로 변한 것은 이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시채를 다 치울 수가 없어 그대로 버려두었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이루어졌다. 마을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면 학이 먹이를 찾아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으로 마을 앞에는 학의 먹이라 일컫는 떡바위가 있다. 이곳에는 떡처럼 반반하고 넓은 바위 두 개가 포개져 있으나 현재는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 앞에는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문 형태로 의지하고 있었는데 복길 간척지를 만들면서 사용해버려 지금은 없다. 이 석문은 중국의 사신들이 드나들 때 사용했던 통문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의 부녀자들이 가장 힘들어했던 것이 새벽에 일어나서 물 받는 것이라 할 만큼 마을에는 물이 없었다. 그럼에도 어느 마을 못지 않게 이름을 가진 샘이 많이 있다. 물이 항상 넘친다 해서 넘샘, 새샘 황샘 통정샘 갯샘 고을샘 구석샘 도롱밭샘 영나리샘 서그태샘 등이 있다. 마을에서 구암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큰 잔등이라 부르는데 예전에 그곳은 공동묘지 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바람을 막아주는 따뜻한 곳이어서 어렵게 살았던 시절 굶주렸던 거지나 주민들이 그곳에서 해바라기를 하면서 죽어갔던 곳이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정월 초하루부터 20여일간은 일을 하지 않고 놀이에만 열중한 적도 있었다. 해서 이 마을 농악은 주변에 널리 알려졌었다. 뿐만 아니라 20여년 전에는 마을 주민들이 불렀던 '소타령[牛歌]'이 민속노래 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주민들은 그때 수상 기념으로 무안군수가 마을 앞길을 포장해주었다고 믿고 있다.

90세의 김초심 할머니가 들려주는 소 타령은 다음과 같다.

소야 소야 망망소야
오양곱장 망망소야
생길몸도 새였는데
소몸으로 생겼느냐
나무휘어 코를 뚫고   이하 생략

남아있는 지명으로 큰잔등 작은잔등, 영진포구를 나타내는 영나리, 방구등 원건너 엽댕이, 서쪽 끝이라 해서 서그태, 마을 입구의 도롱밭, 그리고 뒷재가 있다.

저작권자 © 무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