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문화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해제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1.5㎞ 지점에 위치한 덕산리는 봉대산의 맥을 이은 쥐머리산[鼠頭山]을 주산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3개의 저수지가 있다. 슬산, 내분, 사야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이곳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슬산리, 덕림리, 내분리, 매곡동 일부를 병합하여 덕림과 슬산의 이름을 따서 덕산리라 했다. 함평노씨 광산김씨 함평이씨 등이 산다.

▲광산김씨 동족마을인 모랫들 마을 = 사야는 덕산3리에 속하는 마을로 광산김씨의 동족 마을이다. 원래 마을 이름이 샛들로 불렸다.

샛들은 슬산과 내분 마을 사이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사잇들의 의미다. 샛들이 현재의 마을 이름인 사야로 변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로 보인다.

沙野의 지명 유래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사잇들의 음차에서 비롯됐다. 또 하나는 이 마을의 지형적인 이유로 모래가 많이 쌓인 데서 비롯된다. 마을에서 개양갯들이라고 부르는 저수지 밑의 들은 일제강점기 때 간척사업으로 이루어진 들이다. 간척사업 이전까지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유난히도 모래가 많이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간척이 된 지금도 비가 조금 많이 오면 마을 앞 저수지에 모래가 가득 차 버린다. 해서 모래가 쌓인 들이라는 의미인 沙野로 마을이름을 정했다.

실지로 1789년의 호구총수나 1912년 1917년의 자료에는 사야라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이 마을에 처음 자리를 잡은 사람은 광산김씨 김수정이다. 金守渟(1759 -?, 자-자직, 호-직재)은 김국광의 9세손이며 영암 금정면 연보리에서 대대로 살았으나 집안의 우화로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마을로 들어 왔다. 자료에 의하면‘수정은 가난하지만 극진한 정성으로 부모님을 공양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항으로 보아 이 마을의 設村 연대를 보면 1700년대 후반으로 보이며 일제 강점기까지는 샛들 또는 덕림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 마을은 23세대 중 한 세대만 해주 최씨일 뿐 모두 광산김씨이다.

마을은 옥녀탄금의 전설을 안고 있는 옥녀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앞에는 산고지라 부르는 내분 마을의 뒷산이 있다. 마을 왼쪽에 구미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두세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한 가구도 살지 않는다.

오래 전 마을에는 아름드리의 당산나무가 있었다. 당산제도 지내고 주민들이 앉아서 쉴 수 있는 쉼터이기도 했다. 그런데 마을에서 100석지기나 하던 부자가 당산나무를 베어버리고 그곳을 농경지로 만들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그날 저녁부터 그 부자에겐 이상한 일이 생기더니 급기야는 몇 년 가지 못해 가지고 있는 전답을 모두 잃었다.

주민들은 마을의 수호목인 당산나무를 베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믿고 있다. 지금은 당산나무가 없다.

▲ 사야마을에서 발견된 사은 유고 등 각종 고문헌
▲세권의 유고집 발견= 마을에 자랑거리가 많이 있다. 우선 주민들의 교육열이 대단히 높다. 한때는 40명의 남녀가 대학에 다닐 정도로 대학생 마을이었다. 이러한 교육열이 고시 합격자를 4명이나 배출하고 이 마을 출신들이 정·재계에 진출해서 고향의 이름을 빛내게 하였다. 두 번째는 근면하고 부지런하다. 아끼고 절약할 뿐 아니라 농번기가 따로 없을 정도로 모두 부지런히 일해 80이 되어도 노는 사람이 없다. 세 번째는 부부의 금슬이 좋다. 다른 마을에 비해서 이 마을에는 홀로 사는 독거노인이 네 세대밖에 없다. 70이 넘은 노인들이 많아도 대부분이 부부가 함께 건강하게 해로하고 있다. 네 번째는 주민들이 단합이 잘 된다. 마을에 현안이 있을 때는 미루는 적이 없었다. 마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는 서로 양보와 협조를 해 주민들간에 서로 얼굴을 붉힌 적이 없다. 해서 해제면에서 가장 먼저 새마을 사업을 시작하였다. 다른 마을에서 부러워할 정도로 화합이 잘 되고 있다.

마을에서 벌도로 지내는 당산제 등은 없지만 5월 8일에는 경로의 날로 정해 주민들 모두 여행을 가거나 외식을 한다. 또한 여름철에는 복달임으로 두세 차례씩 행사를 한다.

김용술 이장 댁에서 많은 자료를 발견하였다. 우선‘共睦이 짝을 지어 漢城을 날라가다’라는 기행 문집이다. 1974년에 해제 주민들이 서울에 갔다 온 느낌을 주민인 김옥수(호-옥봉)씨가 기록한 것이다. 또한 세 권의 유고집이 있다. 하나는 광산김씨 김상은이 지은 우석 유고이다. 김상은은 동해 김 훈의 문인이다. 두 번째는 파평윤씨 윤상대가 지은 완재 유고이다. 윤상대는 중암 김평묵의 문인이다. 마지막으로 이 마을 주민인 김경현이 지은 사은유고이다. 사은 김경현(1879-1947)은 산길리 신등 강율수, 학송리 학암 춘사 김원표, 양매리 매곡 잠와 김용수와 함께 해제 4선생에 해당 될 정도로 학문이 대단히 높은 사람이다.

특히 사은 선생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질과 기풍을 지녀 주위의 칭송을 얻었고 평생 동안 효제 충의 돈후 周愼을 삶의 신조로 삼았다. 경서는 물론 문학과 역리에도 밝았으며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선생이 돌아가시자 제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예의를 다했다고 한다.

또한 백학산 월송제 취매정 등의 경관을 읊은 해산시사가 있었다. 주변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중요한 자료인데 당시에 내로라 하는 문인들이 해제의 자연 경관을 보고 읊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향교에 올리는 효부 천장도 있었다.

주민 중 일제 강점기 때 의병운동을 했던 독립유공자도 있었다. 사은 김경현 선생의 동생인 김두현(자-성칠, 호-절산)이다.

마을 중앙에 보호각을 갖고 있는 두 기의 비가 있다. 하나는 삼성당광산김공유적비다. 삼성당의 휘는 재관이며 자는 而栗로 1944년에 건립 되었다. 또 하나는 도암광산김공효행비다. 도암의 자는 원일이며 1944년에 모두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그 밖에 1974년에 제자들이 세운 사은김공(1879-1947)유허비, 1967년에 세운 효자김영두(1891-1967)실적비, 1962년에 세운 나주정씨(1891-1975)절효비, 1967년에 세운 효부유인노씨(1887-1959)실적비 등이 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마을 북쪽에 종이장수가 있었다고 해서 종이장수 고랑이라는 이름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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