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문화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일로읍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한 望月里는 망모산(141.8)을 등에 지고 영산강을 앞에 두고 있다. 望母山은 나주임씨 소포 나덕명과 관련이 있는 산으로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孝心이 깃들어있다. 이 지역은 영산강 하구둑이 막힌 후부터 강변에 펼쳐졌던 널따란 갯벌이 간척사업으로 인해 농지가 되었다. 옥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형국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望月里는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사양동, 망해동, 비로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무안군에 편입시켰다. 현재는 망월동 사양동 비로촌 등 3개의 마을이 있는데 모두 전주 이씨가 입향조이다. 망해동에 노암이라는 전주이씨 제각이 있다.

▲ 망월동 마을에서 본 망모산(망매산)

▲달을 보며 왕족의 아픔을 달랬다는 지명유래 가진 마을

망월동은 망월1리에 속하는 마을로 처음 들어온 사람은 왕족의 후손인 전주 이씨 李俊마(1565-1629, 자-경보, 호-노암)이다. 이준마는 일로읍에 전주이씨로 처음 들어온 사람이기도 한데 임진왜란을 피해 전북 남원에서 이 마을로 들어 왔다.

1789년의 문헌인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노촌면 망해동리와 망월동리가 나온다.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도 일로면 망월리 망해동 망월동으로 나온다. 하지만 1987년 자료에는 망해동이 나오지 않는다.

망월동의 지명 유래는‘마을 동쪽에 있는 망모산의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다른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마을 유래지에 의하면‘전해오는 이야기로 조선조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후손이 인조 때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살았으나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밤마다 떠오르는 달을 보며 배고픔을 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시대나 인물 및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이를 정서적으로 유추해보면 왕족의 회한이 담겨 있는 유래를 지니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세종대왕의 후손이다. 하지만 세조의 왕위찬탈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조상들은 오랜 세거지였던 경기도 양평을 버리고 전북 남원으로 이사를 왔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족들은 다시 무안과 영광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 가족과 생이별을 한 후 홀로 이 궁벽한 산촌에서 살게 된 입향조는 앞산에 떠오르는 달을 보고 외로움과 비정함을 달랬을 것으로 보인다. 해서 망월동의 지명 유래는 입향조가 달을 보면서 왕족의 외로움과 현실의 고달픔을 달랬던 마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마을은 전주 이씨 동족 마을로 타성은 한 가구도 없다. 본 마을인 망월동을 비롯하여 마을 입구에 있는 골짜기가 소 머리처럼 생겼다는 우둣골, 바다를 바라본다는 마을 앞의 망해동, 청호마을과 경계에 있는 박실, 그리고 달팽이 모양의 왓등으로 이루어졌다.

▲ 일로에서 처음으로 동학의 후손을 발견

▲ 전주 이씨 비각
마을은 玉兎望月(옥토끼가 달을 보는)의 형국으로 마을 뒤인 꼬작봉과 땅샛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작은 망모산 큰 望母山(전주 이씨 족보에는 望每山으로 나온다, 이 산에는 두 개의 굴이 있다)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간척으로 형성된 농지가 있으며 마을 우측에 340여년이 되는 팽나무가 있는데 둘레가 4미터 10이 넘는다. 이 나무는 마을의 풍수적인 지형으로 보아 지맥이 허한 곳에 비보의 개념으로 심었는데 후일 마을의 당산목이 됐다. 예전에는 당산제도 지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일로에서는 처음으로 동학 후손을 발견했다. 이중관(호-남오, 1870 - 1894, 12, 12)인데 전주이씨 족보에는 동학농민군 포장으로서 전주성 전투에 참여하고 우금치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항시 백마 타고 나들이를 하였으며 이 지역이 아닌 전라북도에서 동학의 접주를 하며 보국안민의 선두에 서서 맹활약을 하였다고 한다.

영산강 주변의 마을들이 그렇듯이 이 마을 주민들도 영산강이 막히기 전까지는 농지가 없어 어렵게 살았으나 댐이 막히면서 농지가 조성돼 여유 있게 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망머리샘 아랫말 샘 등이 있었으며 범죄 없는 마을로 지정될 만큼 화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뿐만 아니라 전부 친족이어서 주민들간 우애가 깊다.

망해동에 전주이씨 제각인‘老庵’이 있다. 노암은 입향조의 호로 1896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인데 삼문이 있으며 12개의 주련과 10개의 현판이 있다. 다른 마을의 제각과는 다르게 입향조의 호를 제각이름으로 하고 있어 이 마을 주민들의 의식을 짐작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하다. 제각의 뒤에는 전주 이씨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데 흥양군을 모신 신도비가 있으며 그 비각이 독특하다. 또한 문신석도 우람해 우리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상은 아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망머리 꼬작봉 땅샛봉을 포함하여 나드리, 마을 뒤 노랑섬, 마을 서쪽 끝에 있는 부리인 섬끝, 마을에서 청호리로 넘어가는 청망분교 앞의 파랑새 잔등, 꼬작봉 너머 깔치기 위에 구룡개(구렁개라고도 함) 등이 있다. 또한 이 마을에서는 구룡개 위의 바위를 범바위라 부르고 있는데 뒷 마을 죽산2리 양지촌 마을에서는 공알바위라 부른다. 망해동 앞에 있는 둔덕을 간대목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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