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道林里는 청계면소재지의 중앙에 위치한다. 뒤에는 무안의 주산인 승달산이 있고 里의 중앙으로 광주-목포 간 국도 1호선이 지나고 있다.‘道林’이란 지명은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는 지역이란 의미를 갖고 있으나 주민들 사이에서는 큰 길가에 숲이 무성하다 하여 도림리라 칭하였다고도 한다. 원래 도림리는 무안군 일서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청림리 양지촌 삼덕리 대흥리 대암동 격양동 일부를 합하여 청계면으로 편입되었다. 1987년에는 선돌 연곡 백련동 등 3개의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청림 연곡 백련동 월암 문화촌 입석 격양동 등 7개 마을로 이루어 졌다. 선돌과 5기의 고인돌이 있으며 1981년에 목포에서 이전한 목포대학교가 있다. 청림 마을에 삼천재와 삼휴정 그리고 경모재와 화산재가 있다.

▲ 입석마을 전경

▲선돌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

입석은 도림6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선돌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입석이란 지명이 처음 나온 것은 일제강점기인 소화 3년(1928년)부터이다. 현재 목포대학교 정문 옆에는 승달산 자락의 안골과 물맞이고랑에서 내려오는 하천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그곳으로 국도 1호선이 지나면서 다리를 놓게 되었다. 그때 붙여진 이름이 입석교이다. 그 이후 입석교 주변에 형성된 마을이 선돌 마을로 불려진다. 이후 1987년의 자료에는 도림리가 선돌 연곡 백련동 등 3개 마을로 나눠진다. 1993년 도림1리를 1. 4리로, 도림3리를 3. 5리로, 나누고 2000년에 도림1리를 1. 6리로 분리해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마을에 선돌이 언제부터 서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선돌에 관련된 유래는 네 가지 설이 전해져 온다.

하나는 한양에서 8개의 바위가 남으로 내려오다 칠성동에서 7개가 멈추고 나머지 하나가 현재의 자리에 멈췄다는 것. 두 번째는 마을의 비보를 위해, 세 번째는 장사가 가져왔다는 설 그리고 마지막은 돌아보지 말라는 약속을 어겨 바위로 변했다는 설이다.

원래 도림리 일대는 국씨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한 가구도 없고 냉골이라 부르는 곳에 국씨들 묘만 남아있다. 이곳에 살았던 국씨들의 후손은 현재 망운면 장재동에 살고 있다. 후에 청주한씨 韓番仁(자-기옥, 호-둔암)이 들어와 입향조가 되었다. 공은 장흥군 장도면 북교리에서 세거하다가 임진왜란에 피난을 와 이곳 도림리 유점동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그는 영달을 꿈꾸지 않았으며 후손들의 교육에 힘쓰며 자연과 벗삼아 일생을 보냈다.

이후 들어온 성씨가 전주이씨다. 현재는 외부인이 더 많은 복합성씨의 마을이 되었다. 주민들은 원주민을 중심으로 부녀회를 조직하여 상부상조하고 근면한 생활을 하며 화목한 마을 생활을 하고 있다.

▲선돌은 선정비였다

▲ 선돌로 알려진 선정비
입석마을은 승달산의 맥을 이어받은 상대미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국도1호선이 지나고 있다. 청계면의 중심 마을로 목포대학교를 비롯하여 우체국 파출소 등과 버스 정류장을 포함하고 있다. 한때 물이 좋아 이 지역 막걸리의 대명사가 되었던 청계막걸리의 주조장도 이 마을에 있었다. 현재 마을에서 경로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집은 원래 청계면 노인정이었다.

입석은 칠성바우 미륵바우라고도 불려지는데 다세대 주택 옆에 붙어 있다. 예전에는 주택가 길 옆에 있었는데 주변이 정리되면서 그 자리에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게 됐다. 땅을 돋아 주택을 지은 관계로 선돌이 깊숙이 묻혀 있지만 위에는 스텐레스로 보호막까지 쳤다. 선돌의 길이는 350Cm 폭은 160Cm로 사람 모양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선돌 앞에 상석이 있었고 주변에는 커다란 동백나무가 있었다 하나 현재 상석은 없고 어린 동백나무만 자라고 있을 뿐이다. 물론 제사도 지내지 않고 있다.

들어가서 살펴보니 앞면에 희미하게 글자가 조각되어 있다.‘縣監金侯(  )省 恤民善政碑 (  )丑 六月’라 쓰였다. 자료를 찾아 확인해보니 1684년 7월 무안현에 부임해 1688년 2월까지 4년 동안 근무했던 김일성 현감의 선정비였다. 입석은 고인돌이나 거석숭배사상에서 나온 돌이 아니라 원래 선정비였던 것이다.

도림리 일대는 모래 자갈 밭이어서 농사짓기가 매우 어려웠다. 해서 예전에는 어렵게 살았으나 일제강점기 때 국도1호선이 지나가고 1981년 목포대학교가 들어오면서 경제적인 여유를 갖게 되었다. 목포대학교 학군단 옆 배암동이라 부르는 곳엔 고인돌이 많이 있었다.

한국전쟁 때는 이 마을이 좌우의 대립으로 엄청난 소용돌이에 휩싸여야 했다. 이웃 마을에 좌익 사상에 물든 사람이 있어서 주민들은 낮에는 태극기를 달고 저녁에는 인공기를 달 정도로 사상의 혼란을 가져왔으며 살기 위한 치열한 생존의 몸부림이 펼쳐쳤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쟁의 중심지에 있던 청계파출소는 당시에 대나무로 감싸듯이 보호해야 했다.

파출소 앞에 3기의 묘를 안고 있는 묘역이 있다. 주민들이 부르기를 압해도 김씨 땅이라 일컬어지는 이 묘역은 5기의 고인돌을 안고 있다. 예전에는 10기의 고인돌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5기만 확인된다. 그중 2기는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데 3기는 고인돌의 일부가 묻혀있다. 가장 큰 고인돌의 크기는 길이가 380Cm 폭이 290Cm 으로 대형이다. 묘역 앞에는 수백 년이 됐음직한 소나무도 있다.

목포대 정문에서 선돌로 오는 소로 옆에 두 기의 비가 서있다. 1991년에 세운 효자무안박공봉규기행비와 효부달성배씨행적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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