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당산 관련 유래를 갖고 있는 감풀 마을
현경면 수양2리 석북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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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당산 관련 유래를 갖고 있는 감풀 마을
현경면 수양2리 석북 마을
  • 백창석 소장
  • 승인 2011.08.13 11: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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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垂楊里는 현경면 소재지에서 해제면 쪽으로 4㎞ 가량 떨어져 있다. 해제 쪽으로 현경로를 타고 가다 봉대산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만날 수 있는 지역으로 2003년 팔방미인 정보화 마을로 지정됐다. 이 지역은 갯벌 체험과 농산물 수확 체험장 그리고 행복마을로 널리 알려졌다. 봉대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함해만이 펼쳐져 있고 지형상 간척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농경지가 많다. 조선조에서는 함평현 다경면에 포함되었다. 이후 목포부 다경면의 지역으로 수양나무가 많아 수양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석북리 두모동 용정동 일부를 병합하여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시켰다. 수양촌 석북 두동 등 세 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두동에 동구비와 진세민속놀이가 전해져 내려오며 죽산안씨 제각인 경회정이 있다.

▲ 석북마을 전경

▲石北과 席北으로 쓰여

석북은 수양2리에 속하는 마을로 한자표기는 石北으로 쓰기도 하고 席北으로 쓰기도 한다. 席北이란 지명은‘또때’에서 비롯된다. 또때는 돛대를 강하게 발음할 때 나오는 소리로 마을이 배 형국이었음을 나타내준다. 席은 자리 석 또는 돛 석으로 불려지기도 하며 베[布]가 나오기 전 갈대나 띠를 엮어서 돛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이런 이유로 席北이라 한 것이다.

石北은 쌀과 관련된 지명이다. 쌀을 세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홉인데 10홉이 모여 한 되[升]가 되고 10되가 모여 한 말[斗]이 되고 10말이 모여 한 섬[石]이 된다. 수양리는 봉오산(봉대산)의 줄기를 잇는 주변의 형세가 홉 되 말 섬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그중에서 이 마을은 섬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마을이 북쪽을 향해 있다 해서‘石北’이라 칭한 것이다.

실지로 옆 마을인 두동 마을 앞에는 세 개의 섬이 있는데 모두 쌀을 세는 단위와 관계가 있는 이름을 갖고 있다. 즉 소스랑섬이 소두말을 가리키고 되섬{升島]이 되를 가리키고 소스랑 섬 앞의 조그만 섬을 홉이라 한다. 두동은 10되가 모인 말[斗]을 가리킨다.

자료로 마을 이름의 변천을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다경면 席北里,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다경면 席北里, 1917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현경면 수양리 席北里 1987년의 자료에도 席北으로 나온다. 하지만 광산김씨 족보나 진주강씨 족보에는 石北으로 나온다.

이 마을은 진주강씨 광산김씨 밀양박씨 강릉유씨등이 살고 있다. 진주강씨 입향조는 姜克淡(자-이, 호-용호. 1573-1649)이다. 공은 문양공 강희맹의 후손으로 영광 불갑면에서 세거하였다. 당대의 석학 고봉 기대승에게 수업하여 대의를 얻어 들었고 임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최경회의 진중에 들어가 싸웠다. 난이 끝난 후 이 마을에 들어와 살며 후손 교육에만 힘쓴 채 문을 닫고 세상과의 교류를 끊었다.

광산김씨 입향조는 金重南(1634 - ?, 자-성순, 호-죽헌)이다. 공은 나주 문평에 살다가 몸과 마음을 닦을 겸 약초를 찾으러 이 마을에 들렀다가 지형을 보고 살기좋은 곳이라 여겨 정착하였다. 밀양박씨 입향조는 박재헌(호는 금사, 동몽교관 역임)이다. 나주 영산포 관수동에서 세거하다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몽탄면 양장리로 옮겼으나 후일 이 마을로 옮겼다.

▲두 그루씩의 당산나무에 칼 창 철퇴가 놓여 있어

▲ 당산석과 칼
처음 이 마을에 터를 잡을 때는 마을 너머 함해만에 접해있는 淡拜峙(담배장이라 부르기도 한다)라는 곳이었다. 그런데 도적이 많아 현재의 마을로 이주했다. 광산김씨 족보나 진주강씨 족보에 나타난 淡拜峙의 지명이 재미있다.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다. 허나 추정해보면 진주 강씨 입향조인 姜克淡의 淡을 존경하는 고개 또는 장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을의 당산나무 유래가 특이하다. 당산나무가 마을을 둘러싸고 해안가를 향해 세군데 있다. 세 군데 모두 각각 두 그루씩의 나무를 심었으며 곳곳에는 칼과 창 그리고 철퇴를 상징하는 돌이 세워져 있었다. 원래의 나무는 두 아름드리가 넘는 나무였는데 오래 전에 태풍으로 쓰러져 고사되었다. 이후 주민들이 다시 나무를 심었는데 또한 두 그루씩 심어 관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요인을 물었더니 아는 사람이 없었다. 마을유래지를 보면‘어느 무더운 여름날 마을이 형성될 때 도둑과 무서운 돌림병이 나돌아 마을은 하루 아침에 쑥대밭이 되었다. 주민 중 한 사람인 김영감이 꿈을 꾸는데 마을 태극당에 한 신령이 나타나 서쪽에 남신당과 남쪽에 여신당을 세워야만 마을이 해를 면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들은 주민들은 당산을 세우고 남신당에는 돌칼 여신당에는 돌창을 세우니 그 후부터 마을은 평온을 되찾고 전염병도 퇴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도둑 방지와 액막이용으로 나무를 심고 돌을 세우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이곳에서 당산제도 크게 지냈으나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

예전에는 마을에 교회가 있었다. 그러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시무하던 목사님이 이념갈등에 희생이 되자 교회를 가라울로 옮겼다. 가라울로 옮겨졌던 교회는 다시 현재의 양정교회 자리로 옮겨 자리를 잡아 부흥에 성공하였다. 한국전쟁 때는 이 마을도 사상에 의한 갈등이 많아 10여명이 넘는 주민들이 희생을 당했다. 한 집에서는 4형제가 모두 희생을 당해야 했던 과거도 있었다.

예전에 이 마을은 얼마나 가난했던지‘이 마을 큰 애기는 쌀 서말도 못 먹고 시집간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마을 못지 않게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여유가 있었다.

2007년 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되면서 감풀마을이란 새로운 지명을 얻기도 하였다. 감풀이란 썰물 때에만 드러나는 넓고 평평한 모래벌판 즉 모래추를 말한다. 테마마을 지정 이전에도 주민들은 황등풀 큰풀 작은풀이란 지명을 갖고 있었다. 현재 한옥이 17채가 들어서 있고 정자가 3동이 있다.

▲전통테마 마을

함해만에 접해있는 이 마을은 아늑한 만의 형국이어서 각종어류의 산란장이었다. 주민들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건복(참복 큰복)과 장어 준치 덕자도 죽상어 돌고래 등등이 잡혔으나 현재는 구경할 수도 없다고 한다. 특히 이곳의 장어는 영산강의 구진포나 명산 장어의 명성을 얻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현재는 낙지 전어 숭어 꽃게 등이 잡히고 있다.

마을 주변에 남아있는 지명이 많다. 마을 입구의 수랑골 큰골 작은골 목장골 가는골 가차골 가장골 녹골 등이 있다. 수랑골은 수맥이 좋아 현재 저수지가 들어서 있으며 목장골에는 축사가 많이 들어서 있다. 또한 오해미 재마당 새터 큰동네 샘골 요사리 모랭이 모새미 새중 비석거리 등의 지명도 있다. 재마당은 마을 뒤 정자 있는 곳을 말하는 곳으로 재를 모아두었던 터였으며 오해미는 마을 앞 바닷가를 말한다. 새중은 마을 가운데 진주강씨 묘가 있는 곳이다.

▲ 박노학 효자비
비석거리에는 효자박노학실행비가 있다. 사각 돌 기둥이 받치는 지붕 안에 실행비가 있는데 상당히 독특하고 흥미로운 비각이다. 朴魯學(1872 - ?, 자-찬도, 호-성와)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조예가 깊어 주변 마을의 師表가 되었다.

박노학의 아버지는 만성장염과 천식을 앓았는데, 그는 아버지의 치료를 위해 겨울철에는 자라를 구하고 여름에는 홍시를 바치는 등 정성을 다하여 간병하였으며 이러한 효심으로 아버지의 병세는 호전되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는 시묘를 살았는데 상복을 벗을 때까지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고 죽으로 연명하였다. 후일 박노학이 죽자 마을 사람들은 1921년 그의 효심을 기려 그가 살았던 마을에 효자각을 세워 후세의 귀감으로 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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