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龍山里는 일로읍소재로부터 몽탄 쪽으로 1㎞ 가량 떨어져 있으며 811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본래 무안군 일로면 지역으로서‘산이 용처럼 생겼다’해서 용산이라 하였는데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정리, 공수동, 월성리, 송암리와 회인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1920년대 일본인에 의해 영화농장이 들어서면서 농장 백호동 등의 마을이 들어섰으며 현재는 인동 농장 평정 백호동 연화동 월성 등 6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농장 마을에 김시라 생가가 있으며 용산 마을에 해주오씨 제각인 영사재와 왕뫼에 나주정씨 제각이 있다.

▲ 백호동마을 전경

▲간척 전에는 강 가의 마을이었다
백호동은 용산4리에 속하는 마을로 배를 재배하는 과수원이 많은 마을이다. 백호동의 지명유래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연적인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간척이 이루어지기 전 이 마을은 영산강 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오는 강가로 백사장에 하얀 물결이 굽이치는 전형적인 어촌 마을이었다. 해서 흰 白 물 湖를 써서 백호동이라 하였다.

다른 하나는 한자의 표기가 틀리지만 앞으로 백 세대가 살 정도로 살기 좋은 마을이라 해서 百戶洞이라 하였다 한다. 세 번째는 마을 형국이 황새모양이라는 풍수적 지형에서 비롯되었다. 이웃 마을 학두리가 학의 머리이고 이 마을은 황새밥통에 해당된다고 본 것이다. 해서 입향조가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황새는 물을 좋아한다 하여 白湖洞이라 이름 한 것이다.

입향조는 경주정씨 鄭達鎬(자-달선, 호-죽사, 1894-1966)다. 공은 1920년대 이곳에 영화농장이 조성되면서 상신기리에서 이주하였다. 상신기리는 경주정씨 동족마을이다. 공은 건장한 신체에 독서를 즐겨하였으며 형제간의 우애와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자료로 이 마을의 변천사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나 1912년 1917년의 자료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1987년의 자료에서 비로소 무안군 일로읍 용산리 백호동으로 나온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영화농장이 조성되면서 형성되었다. 영화농장은 1925년 인의산 돈도리에서 회도를 잇는 방조제가 완공되어 갯벌이 뭍으로 변하면서 만들어졌다. 거의 5리나 되는 둑을 축조한 사람은 일본인 히또미로쿠타로(人見鹿太郞)였다. 그는 5천 두락 크기의 에니와(榮和)농장을 차렸다. 이때 조성된 마을이 이 마을을 포함하여 의산리 돈도리와 농장 마을 등이다.

▲무안 제일의 배나무 과수원이 있다.

▲ 백호동 배밭

히또미는 의산리와 용산리 주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가 일본으로 물러갈 때 했던 행위가 관심을 갖게 한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이 몰리자 히또미는 그 동안에 관공서나 주민들과 주고 받았던 모든 서류를 두레미 마을 앞에 있었던 수문 주변에 묻었다고 한다. 지금은 돈도리에 수문이 나면서 그 수문이 없어졌지만 주민들은 그때 히또미가 묻는 것을 주위 사람들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간척으로 농장이 만들어졌지만 주민들은 물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이 농장에 물을 댔던 저수지는 몽탄 당호저수지와 지금은 백련 단지가 된 백련저수지였다. 두 개의 저수지가 있었어도 물이 모자라 조금만 날이 가물면 물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마을은 물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어서 크게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영산강이 막히면서 비로소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마을은 공동산을 주산으로 하고 앞에는 넓은 간척지 농장이 펼쳐져 있다. 해서 주민들은 문을 열면 넓은 들판을 대할 수 있어 이 마을 아이들에게 높은 꿈을 꿀 수 있게 해준 좋은 터였다고 한다. 공동산은 공동묘지 산이라고도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영화농장의 주인이었던 히또미가 농장 주변 사람들이 죽으면 묘지로 쓸려고 샀던 산이다. 지금은 군유지가 되었으며 날이 궂거나 비가 오는 때는 사람들이 산 주변에 지나가는 것을 꺼리기도 했다.

이 마을은 일로읍에서 가장 모범적인 마을이다. 주민들이 서로를 위할 줄 알고 협조하며 큰 소리가 대문을 넘어가지 않는다. 예전에는 울타리가 없어도 불편함이 없었다. 또한 아픔을 나눌 줄 알고 기쁨은 함께 하는 마을이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에는 이 마을 출신들이 사법고시 출신자를 포함하여 관계 학계 경제계 등의 진출도 활발하다.

이 마을에 장구의 달인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이미 고인이 된 김남용(김토수라고도 함)옹인데 이 마을 농악의 기초를 놓았던 분이다. 지금은 계승자가 없어 농악이 전래되지 않지만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의 농악은 무안뿐 아니라 전라남도에서는 알아주던 솜씨였다. 해서 행사 때마다 초청을 받아 일로 농악을 과시하였다. 그 모든 시초가 김남용 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마을의 주 소득원은 과수원이다. 무안에서 가장 많이 배를 수확하고 있는데 마을 뒤가 대부분 배 밭이다. 마을의 과수원은 오래 전 목포에서 온 주씨라는 사람이 최초로 가꾸기 시작하였다. 기후가 따뜻하고 과실을 재배하기 좋은 조건을 갖고 있어 점차 배의 주산지가 되었다. 이곳의 배는 빛깔도 좋고 당도도 높아 많은 사람이 찾는다고 한다.

마을에는 주민들이 즐겨 먹는 梨下酒가 있다. 뜻이 맞은 친구끼리 어울려 배꽃이 핀 과수원에서 술판을 벌리고 술잔에 배꽃이 떨어지면 마시는 낭만적인 풍습이다. 이러한 풍습은 배 밭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그만큼 이 마을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기에 즐길 수 있는 멋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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