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光岩里는 일로읍에서 몽탄쪽으로 811번 지방도로를 타고 3㎞ 쯤 가다 마주치게 되는 지역이다. 몽탄면 양장리와 접하고 있으며 옆 마을인 산정리에는 일로농공단지가 들어 서 있다. 예전에 지역 사이로 호남선 철도가 지나갔으나 현재는 폐선부지로 남아있다. 무안현 노촌면 廣巖里로 나오며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일로면 光岩동으로 나온다. 지명의 유래는 마을 뒤에 넓은 바위가 있다하여 광암 또는 반동이라 불렀는데 일제시대 들어와 廣巖이 현재의 光岩으로 바뀌어져 쓰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운동, 석정, 등림동, 진사동, 반동, 산정리 일부를 병합 광암리라 하여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으나 현재는 광암 등림 진사동 등 세 개의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 진사동마을 전경
▲진사가 배출된 마을

▲진사가 배출된 마을 진사동은 광암3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진사를 배출했다 해서 붙여졌다. 마을 앞에 있는 옥산골은 옥씨들이 살았다는 골짜기인데 그곳에서 진사를 배출했다는 것이다. 현재 마을에 옥씨들은 한 가구도 살지 않아 언제 누가 진사에 등과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도 옥산골 곳곳에 기와조각 등 살림 파편들이 나와 예전에 사람이 살았음을 추정할 수 있는 각종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마을 뒤 초당인 도남재가 있었던 부근에 솔등재라고 부르는 지명이 있다. 솔등재가 있는 재는 예전에 삼향이나 목포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인데 주민들이 그곳에 진사를 배출했다는 표시를 한 것이 지명이 됐다. 다른 지역에선 솔대길 또는 솔대배미라 해서 진사 배출을 기념했다. 솔등재 옆에는 주막도 있었다.

이 마을에 주된 성씨는 여양 진씨와 도강 김씨다. 입향조를 찾기 위해 여양 진씨의 대동보를 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도강 김씨의 입향조는 뚜렷이 나온다. 해서 이 마을 입향조로 추정할 수 있는 사람이 도강 김씨 金 點(자-이점, 호-고와. 1573-1634)이다. 공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부장으로 명량대첩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후 나라로부터 선무공신에 등록되어 녹권을 받기도 했다.

공은 강진에서 이주해와 일로 농공단지 안에 있었던 극산동에 자리 잡았다. 지금은 농공단지가 들어서 재각 등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묘비 등을 통해서 1600년대 초에 극산재에서 이 마을로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문헌을 통해서 본 이 마을의 역사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 무안현 노촌면 進士洞으로 나온다. 1912년에는 무안군 일로면 진사동으로, 1917년의 자료엔 무안군 일로면 광암리 진사동으로 나온다.

▲개산에서 시회를 열기도
마을은 윗 진사동과 아래 진사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골짜기 형국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뒤 동산을 지나 무재봉 개산 매봉으로 이어지는 산 사이에 자리 잡았다. 마을 앞에는 옥산골과 토석 채취를 하고 있는 산이 있으며 마을 왼쪽으로는 800번 버스가 지나는 길이 있다. 또한 마을 오른쪽으로는 고속도로와 고속철도가 지나고 있어 예전에는 고요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마을이 현재는 수선스러워 보인다.

마을 입구에 두 개의 비석이 있다. 1932년에 세운 개산녹음시회기념비와 1988년에 세운 개산녹음시회사적비가 그것이다. 구한말 이 마을의 큰 선비였던 도남 진병영선생을 기리는 비다. 도남 선생은 개산 아래에 도남재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또한 제자들을 중심으로 시회를 열어 학문의 도도함을 널리 알려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비문 외에는 도남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알 수 있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아 아쉬웠다. 원래 이 비석은 개산의 도남재가 있었던 곳에 있었는데 서해안 고속도로가 나면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開山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주민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본래는 산을 개척하여 사원을 건축하는 일을 지칭하는 불교용어이다. 즉 고대에는 사원들이 깊은 산 속에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개산이라 하였으며, 사원의 제1대 住持를 개산이라 높여 부르기도 했다. 후대에 이르러서는 이외에도 한 종파의 창시자를 칭하여 開山祖師라 하였다. 전해지는 말로는 증산교의 창시자가 이 마을 출신이라는 말이 있음을 보면 무심히 넘어갈 것은 아니다. 특히 개산녹음시회는 절을 창건한 승려의 죽은 날을 기념하는 개산법회를 연상시켜 여러모로 흥미를 갖게 하는 지명이다.

 

▲한 그루만 남은 팽나무
윗 진사동 앞에는 일제강점기 말에 축조한 저수지가 있다. 현재 저수지 옆에는 토석 채취를 위해 산을 깎아 내리고 있었다. 여기서 나온 흙으로 남악 신도시 건설을 위한 터 다짐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저수지 밑에는 팽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원래는 6그루의 나무가 있었다고 하나 나머지는 고사되고 한 그루만 남은 것이다. 수령은 300여년에 둘레가 4미터 90으로 수형이 잘 잡혀있다.

 

이 마을에서는 담배농사를 많이 짓고 있다. 대부분 주변 마을에서 이 마을 땅을 임대하여 짓고 있으나 시금치와 함께 마을의 주 소득원이 되고 있다.

옆 마을 상신기리 탐방 때 그 마을 주민들이 기산난리(개산난리)를 말한 적이 있었다. 개산 고개는 1894년 갑오년에 동학 농민군들이 제폭구민 구국항쟁을 외치면서 몽탄에서 삼향으로 이동할 때 일본군을 포함한 토포군을 만나 싸웠던 현장이다. 이때 상신기리 마을 주민이 붙잡혀 곤욕을 치뤘다는 사실이 있었던 곳인데 이 마을 주민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개산의 의미를 되새겨 볼 때 흥미로운 마을임에는 틀림 없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옥산골 옆의 새터골이 있으며 현재 재제소가 있는 곳을 배달등이라 부른다. 예전에 영산강 물이 들어왔을 때 배가 닿았던 곳이라 붙여진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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