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支壯里는 일로읍 소재지에서 청계면 방면으로 1㎞ 떨어진 곳에 있다. 일로 청계간 815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몽탄면 봉명리와 접하고 있다. 본래는 무안군 이로면 지역으로서 지장골 또는 지장동이라 하였는데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 서암동 삼호리 덕정 인곡리 연화촌 청금성 남창 일부를 합하여 지장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대절 송태(덕정) 청금성 등 3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덕정 마을 앞으로 남창천이 흐르고 있으며 조선시대 후기 시장과 군량미 저장 창고인 남창이 있었다. 또한 서해안고속도로 일로 나들목이 있다. 청금성 마을에는 회화나무 당산나무와 고인돌이 4기가 있으며 대절 마을에는 중구할머니 전설과 14기의 고인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 청금성마을 전경

 

▲높은 벼슬아치를 배출해 붙여진 이름
청금성은 지장3리에 속하는 마을로 지명이 특이하다. 지명에 城이 붙은 것도 그렇고 靑衿이란 단어가 쉽게 쓰여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을유래지에는‘마을의 형상이 여인의 옷깃 같다 해서 靑衿城이라 부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주민들은 오래 전 이 마을에 살았던 장흥고씨가 초막동에서 서당을 열었는데 제자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길에 올라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청금성은 지장3리에 속하는 마을로 지명이 특이하다. 지명에 城이 붙은 것도 그렇고 靑衿이란 단어가 쉽게 쓰여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을유래지에는‘마을의 형상이 여인의 옷깃 같다 해서 靑衿城이라 부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주민들은 오래 전 이 마을에 살았던 장흥고씨가 초막동에서 서당을 열었는데 제자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길에 올라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참고로 靑衿은 두 가지 역사적인 사실을 연상케 한다. 하나는 통일신라시대 백제인들로 구성된 군사조직의 하나인 청금서당이며 또 하나는 靑衿錄인데 조선시대 유생들의 명단을 적은 명부이다. 또한 옆 마을인 대절 마을에 성터가 있었다는 대절 마을 주민들의 말도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과 주변의 흔적이 청금성 마을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 모르지만 후일의 연구를 위해 기록해 둔다.

이 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나 누가 언제부터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주변에 관련 성씨들의 門山과 주민들의 구전으로 보아 광산김씨와 장흥고씨 등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을유래지에는‘밀양박씨 朴廷壽(자-의상, 호-한헌)가 남원군 주생면 구천리에서 세거하다가 병자호란을 맞아 이곳으로 남하하여 은둔하여 살았다’고 하나 주민들은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한다. 또한 밀양박씨가 살고 있지도 않다.

현재 이 마을의 입향조로 볼 수 있는 것은 무안박씨 박 형(자-사미, 1687-1744)이다. 공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무안박씨의 족보와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추적한 결과다. 이후 전주이씨 이천서씨 등 여러 성씨들이 모여 화목하게 살고 있다. 이 마을에 살았던 여러 성씨 중 온양 방씨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목포에서 비단장수를 해 많은 돈을 벌었다고도 한다.

문헌으로 지명의 유래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이로촌면 靑衿里로 나온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엔 무안군 이로면 청금성리와 인곡리가 나오고 1917년의 자료에도 일로면 지장리 청금성리와 인곡리가 나온다. 1987년엔 무안군 일로읍 지장리 대절 삼호 송태 청금성이 나온다.

▲회화나무 당산이 지켜주는 마을

▲회화나무 당산이 지켜주는 마을새터 큰동네 작은재로 이루어진 이 마을은 풍수적 형국이 주산 뿐 아니라 조산을 비롯한 좌청룡 우백호가 잘 잡혀있다. 첫 눈에 보아도 배산임수에 와우형의 전형적인 촌락 구조이다. 단지 마을 입구에 길을 가로질러 수로가 지나고 있어 아쉬울 뿐이다. 이런 좋은 터에 많은 일들이 있었겠다는 질문에 한 주민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제당봉에서 힘차게 뻗어 내리던 맥이 장봉산으로 뻗어가던 중 담재에서 일본인에 의해서 맥이 잘려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는 큰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인곡촌 또는 담터골로도 불리는 작은 재 앞에는 회화나무 당산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길을 사이에 두고 구수나무도 함께 있었는데 구수나무는 죽고 현재는 이 나무만 마을을 지키고 있다. 회화나무는 우리 선조들이 최고의 吉祥木으로 손꼽아 온 나무다. 이 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나 큰 인물이 날 뿐 아니라 잡귀신이 감히 범접을 못하고 좋은 기운이 모여든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우리 선조들은 이 나무를 매우 귀하고 신성하게 여겨 함부로 아무 곳에나 심지 못하게 했다.

둘레가 270Cm인 이 나무는 약간 기울어져 있어 보수가 시급하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의 꽃 피는 모습을 보고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했다. 즉, 꽃이 수관의 위쪽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아래로 내려오며 피게 되면 풍년이 오고, 아래쪽 꽃이 먼저 피면 흉년이 든다고 믿어 왔다. 회화나무 옆에는 4기의 고인돌이 있다. 원래는 5기였는데 1기는 농지 정리 때 묻혀버린 것이다.

이 마을에 동학 접주가 살았다. 호적명은 박기삼인데 족보명은 朴淇本(자-도명, 1860 - ?)으로 나왔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기삼은 공부를 많이 했던 사람인데 갑오년 동학 때 주변 마을의 대표인 접주로 활약했다고 한다. 동학이 진정되면서 관군들에게 쫓겼는데 토포군들이 까마귀떼처럼 마을에 몰려 와 기삼의 집을 쓰려뜨렸다고 한다. 현재 마을에서는 기삼의 증손부로 홍정순 할머니가 살고 있다

마을 앞에는 삼향장이라 부르는 장터가 형성되었었다. 세명장이라고도 부르는 이 장은 해로를 이용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몽탄, 삼향, 청계뿐만 아니라 나주에서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큰 장이었다. 지금은 일로읍내로 옮겼지만 장날이 되면 일로나 몽탄 사람들이 담터재를 넘어 마을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마을입구에는 마을을 가로 지르는 시멘트 구조물인 농수로가 나 있다. 이 수로는 감돈리 저수지의 물을 일로 전역에 농업 용수로 공급하는 통로이다. 예전에는 농사에 필요한 통로였을지 모르지만 현재는 마을의 미관을 해치는 장애물로 주민들도 처리에 고심하고 있었다. 마을에 큰동네 샘과 작은재 샘이 있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가뭄이 들 때 주민들이 올라 가 기우제를 지내거나 치성을 드렸던 제당봉이 있으며 노루샘이 있는 장천샘도 있다. 또한 초막동 감적골 장파골 산골 뒷동산 서당골 아랫잔등 새터잔등 이문안 똑다리 빗갈이 서망골 함정골 구수나무골 평상골 수랑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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