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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협조가 잘 이뤄지는 山下三寸의 마을
현경면 평산2리 평림 마을
<마을탐방>‘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2011년 07월 30일 (토) 11:50:31 백창석 소장 무안향토사연구소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平山里는 현경면 소재지에서 함평으로 가는 3㎞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811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본래 목포부 현화면의 지역으로 1914년 평림촌과 다경면의 포림리 응치동 유수정 통정리를 합하여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원평산 평림 통정 유수정 등 4개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里 가운데로 무안-광주간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평산에 팔바윗등을 포함한 13기의 고인돌이 있으며 평림에 6기 그리고 통정에 5기의 고인돌이 있다. 평산에 평산사 평천정사 계산재 등의 제각이 있으며 평림에 무안박씨 제각인 경모재와 입석도 2기가 있다.

   
▲ 평림마을 전경

▲山下三寸의 마을

평림은 평산2리에 속하는 마을로 무안박씨와 온양정씨 등이 사는 마을이다. 무안읍 매곡리 수반과 양림 마을에 인접한 이 마을은 원래 마을 앞 연화동에 자리를 잡았다. 연화동은 연화부수의 길지가 있다고 알려진 곳이다. 그런데 어느날 지나가던 스님이 이 터가 좋지 않아 후환이 염려스러우니 옮겨야 한다고 하자 현재의 마을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처음 형성될 때 이 마을의 이름은 망뫼[望山]였다. 입향조와 관련된 이름이다. 입향조는 이웃 수반 마을에서 이 마을로 이주해온 무안박씨 朴慶(자-자선, 호-경암, 1581-1664)으로 박 염(1525-1603)공의 다섯째 아들이다. 박염 공은 아들인 경란을 이웃 마을에 이주시켜 놓고 자주 산에 올라 안부를 살펴보니 후세 사람들이 그 산을 망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아들이 사는 마을을 망뫼라 이름했다. 주민들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평림촌으로 불렀다 하나 조선시대부터 평림촌으로 불려왔다. 마을이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온양 정씨는 무안박씨에게 장가를 들면서 자리 잡은 것이다.

문헌으로 본 마을 이름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 현화면 평림촌으로 나온다. 이후 1912년에 현화면 평림촌, 1917년에 현경면 평산리 평림촌으로 나오다  1987년에 현재의 이름인 현경면 평산리 평림으로 나온다.

이 마을은 망뫼 연화동 나드리로 이루어졌다. 나드리는 들고 나간다는 순수한 우리말 이름이다. 예전에 나드리 앞은 해제나 지도 망운 등지에서 함평을 가거나 한양으로 갈 때 거쳐가는 큰 길목이어서 주막도 여러 개가 있을 정도로 항상 사람들이 붐볐다. 이러한 번화함이 일제강점기 때 현경면에서 전기불이 가장 먼저 들어오게 했다. 

주민들은 이 마을을 山下三寸이라 불렀다. 감방산 아래의 세 마을이란 뜻이다. 즉 무안박씨 동족 마을을 이루고 있는 무안읍 매곡리의 양림과 수반마을 그리고 평림촌을 말한다.

▲各氏바위 전설이 있어

마을에 각씨바위 전설이 있다. 신랑 각시의 각시가 아닌 여러 성씨들의 바위를 말한다. 마을 뒤에 백수자리라는 곳이 있다. 백수자리는 首座 벼슬을 하던 수원 백씨가 살았던 곳을 말하는데 와전되어 불려지는 곳이다. 예전에는 이곳까지 물이 들어왔는데 그곳에 신행을 가던 일행이 있었다. 한 겨울이어서 추위가 대단해 주변이 꽁꽁 얼었다. 일행은 얼음을 믿고 물을 건너고 있었는데 갑자기 얼음이 깨지면서 모두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이후 이곳이 육지가 되면서 여러 바위가 생겼는데 각씨바위 신랑바위 가마바위 말바위 상객바위 함바위 등이 그것이다. 이 바위들은 6기의 고인돌을 말하는데 무안-광주간 고속도로 공사 때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지금도 마을에서 지하수를 파거나 조금만 깊이 파면 예전에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왔음을 알 수 있는 뻘이 나오고 뱃 조각 등이 나온다.

마을 앞 동각에는 두 개의 입석과 들독이 있다. 입석은 할아버지독과 할머니독이라 부르는 선돌인데 연화동에 있던 것을 옮겨 세운 것이다. 할아버지 독은 길이 210㎝ 둘레 210㎝의 비석형이고 할머니독은 170㎝의 사각석주형이다. 입석을 세우게 된 배경은 마을유래지 기록에 의하면 마을의 단합을 위해서라고 한다. 예전 당산제를 지낼 때는 이 입석에서부터 거리굿이 시작되어 샘굿 등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내고 있지 않다. 젊은이들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오래 전에 수형이 잘 잡혔던 당산목인 소나무가 충해로 죽으면서 점차 지내지 않게 된 것이다.

예로부터 마을에 마을 뒤로 길이 난다는 말이 전해 내려왔다. 그것을 입증이나 하듯이 일제강점기 때는 함평 학교에서 이 마을을 거쳐 현경까지 철로를 놓으려다 놓지 못한 일이 있었고 현재는 망운 광주간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앞으로는 고속전철이 마을 뒤로 들어설 것이라고 한다.

주민들은 마을 자랑을 많이 한다. 서로 양보하고 협조가 잘 되어 주민들간 얼굴 붉힌 일이 없다고 한다. 특히 지난 새마을 사업 때 마을길을 넓힌 일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그때의 주민들 협조가 오늘날 농사를 짓는데 많은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이동하는데 편리해 고마워하는 것이다.

5-60년대에는 마을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계몽운동으로 춘향전 심청전 등 연극을 공연해 관내 제일의 마을이란 평을 듣기도 했다. 또한 백중날이 되면 마을 잔치가 이루어지는데 이때는 모든 주민들이 나와 마을 청소를 비롯하여 경로잔치를 크게 열기도 한다.

▲유물 유적들이 많아

2004년 무안-광주 고속도로 공사 중 평림 구간에서 평림지석묘군 평림유적 평림 유물산포지 등이 지정되었다. 평림지석묘군에서는 6기의 고인돌 중 2기에서 석관형의 매장시설이 발견되었으며 그곳에서 석촉1점과 삼각형 석도 1점이 발굴하였다. 평림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 주거지 4기, 원삼국시대 주거지 15기, 통일신라말 -고려초 가마 2기, 추정고분 주구1기 수혈 34기 토광묘 2기 회격묘 1기 민묘 3기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나드리 옆을 보노골이라 하고 마을 뒤를 장승거리라 하며 장도(藏刀)라는 지명도 있다. 연화동 너머를 幢너머라 부르는 외에 큰소랏 또딴불 등의 지명이 있다.

마을 앞 망산에는 무안박씨 제각인 경모재가 있다. 1960년대 중반에 세워진 이 제각은 삼향면 남악리 유안당의 곳간을 옮겨 지은 것이다. 제각 중에는 드물게 맞배지붕의 형태다. 안에는 상량문 등 2개의 현판이 있다. 뒤에는 무안박씨들의 묘가 있는데 입향조의 묘도 있다.

삼호 박일상의 정자인 삼호정이 있다. 박일상은 민제 선생의 문인으로 무안 향교의 전교(당시는 직원이라 했음)를 10년 재임하면서 이 지역에 선비의 유풍을 진작시켰다. 1957년에 건축되었으며 현판이 8개 있다.

1977년에 세운 정소례여사효열비, 박석무가 찬한 삼호 박일상의 비, 효열비남양홍씨비와 임단박공부부3효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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