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선비 곤재 정개청선생의 묘가 있는 마을
몽탄면 명산2리 도산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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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선비 곤재 정개청선생의 묘가 있는 마을
몽탄면 명산2리 도산 마을
  • 백창석
  • 승인 2011.07.06 16: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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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
(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明山里는 삼불산을 주산으로 하고 영산강을 사이로 나주 동강면과 마주하고 있다. 몽탄대교가 놓여지기 전에는 이곳의 몽탄 나루를 통하여 나주를 왕래할 수 있었다. 본래 무안군 박곡면 지역으로 명호동과 도산의 이름자를 따서 명산리라 했으나 동쪽에서 해가 뜨면 아주 밝은 곳이 된다는 의미도 있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도산리 명호동, 명암 일부를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명산촌과 도산 마을이 있다. 명산은 일제강점기 때 가장 번성했던 마을이며 무안의 五味 중 하나인 명산장어로 유명하다. 도산은 곤재 정개청 선생의 묘가 있으며 고성정씨 제각이 있다.

▲학문이 높은 선비가 있었던 마을 도산은 명산2리에 속한 마을로 안골 가운데촌 서촌 귀달리로 이루어졌다.‘道山’이란 지명의 유래는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마을유래지에 따르면‘후삼국시대 왕건군과 견훤군이 왕래하던 길의 윗마을이라 해서‘道上’으로 부르다가 현재의‘道山’으로 바뀌었다’고 했으며 또 하나의 유래는 호승예불이라는 명당이 있어 여기에 묘를 쓰면 정승이 난다고 하여‘도산’이라 칭하였다는 설도 있다.

도산은 명산2리에 속한 마을로 안골 가운데촌 서촌 귀달리로 이루어졌다.‘道山’이란 지명의 유래는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마을유래지에 따르면‘후삼국시대 왕건군과 견훤군이 왕래하던 길의 윗마을이라 해서‘道上’으로 부르다가 현재의‘道山’으로 바뀌었다’고 했으며 또 하나의 유래는 호승예불이라는 명당이 있어 여기에 묘를 쓰면 정승이 난다고 하여‘도산’이라 칭하였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 마을에는 조선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큰 선비 곤재 정개청 선생의 묘가 있다. 곤재 선생은 학문이 깊었을 뿐 아니라 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 등에도 뛰어난 선비였다. 비록 함경도 귀양지에서 죽어 이 마을에 들어왔지만 그를 사모했던 많은 제자들이 이 마을 이름을 곤재 선생을 기리는 의미로 도산이라 하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다.

마을유래지에는 이 마을에 최초로 들어온 사람을 고흥에서 살다가 이주한 경주김씨 김수진으로 보고 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경주김씨 족보를 보고자 하였으나 족보가 없었다. 70대의 경주김씨 후손에게 물어보니 자신은 입향조의 12대손이라고 한다. 추정해보니 400여년 전에 들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곤재 정개청 선생의 무덤이 이곳에 있고 후손들이 여기에 살고 있었다. 곤재 선생은 1590년에 함경도 경원의 유배지에서 죽어 이곳에 묻힌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이미 고성정씨들이 살고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여겨진다.

자료로 살펴 본 이 마을의 역사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 박곡면 도산리로 나온다. 이후 1912년에도 박곡면 도산리, 1917년에는 박곡면 명산리 도산, 그리고 1987년에 비로소 현재의 행정 지명인 몽탄면 명산리 도산으로 나온다.

▲곤재 정개청 선생의 묘가 있어
마을은 아늑한 灣의 형상이다. 마을 앞의 큰 길인 삼일로에서 한참 들어와 소쿠리 형태로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물이 들어왔다 하니 마치 호수처럼 보였을 형상이다. 이런 터는 나주 임씨들이 자리 잡은 이산리 배뫼 마을과 같은 형국이다. 마을 앞이 현재처럼 농지가 된 것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서다.

마을은 비선등을 주산으로 좌로 청용등 우로 두대산이 있으며 안산으로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는 당살뫼가 있다. 비선등 주변에는 서당골이 있으며 그 뒤에는 태봉뫼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에서 명산 나루터로 가는 잔등을 사장재라 부른다. 사장재 너머에 일본강점기 때 놓여진 철도가 통과하는 굴이 있는데 백락(벽력)처럼 소리를 지르고 도망한다고 해서 붙여진 백낙굴이 있다.

한국전쟁 때 마을이 쑥밭이 되었다. 당시 마을에는 좌익운동을 했던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의 영향을 받았던 주민들이 많아 전쟁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 것이다. 그에 대해 주민들은 더 이상 말 꺼내기를 주저했다.

전쟁 이후 마을은 그야말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았다. 주변 마을에서는 가마니 고장이라 할 만큼 가마니를 짜서 연명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주민들의 단합과 역경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들이 모여 놀라울 정도로 변신해 지금은 어느 마을 못지않은 경제적 여유를 찾았다. 또한 이 과정에서 대통령 표창을 비롯한 각종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삼일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은 가로수가 잘 가꾸어져 있다. 무안의 어느 마을에서도 볼 수 없는 가로수 길이다. 예전에는 은사시나무를 심어 숲 터널을 만들었으나 봄철 비염과 알레르기의 원인이 되자 베어버리고 지금의 은행나무를 심어 조성한 것이다. 이렇게 좋은 마을 길 주변에 축사들이 많이 있어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현재 마을에는 5곳의 축사가 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상당부분이 고성정씨 소유의 산이다. 주민들의 말로는 고성 정씨가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산들은 전부 자기 소유라 하였다니 入眼之地의 처사가 아닌가 한다.

안골 위에 곤재 정개청(鄭介淸, 1529-1590) 선생의 묘가 있다. 곤재 선생은 대동세상을 꿈꾸었던 큰 선비로 기축옥사의 또 다른 피해자이다. 무덤은 우거져 있고 길을 찾기도 어렵다. 달랑 묘비 하나만 서 있어 조선을 개혁하려 했던 당대의 풍운아 묘라고는 볼 수 없다. 묘비에 고산 윤선도라는 이름이 있어 무슨 이유인가 물었더니 주민들은 윤선도가 선생의 묘 자리를 잡아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출생 시기가 맞지 않는다. 비문을 읽으려 하였으나 오래 되어 읽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 곤재 선생의 묘가 있는 이유를 물었더니 아는 사람이 없었다. 고성 정씨 문중에 물었더니 곤재 선생이 유배지에서 돌아가실 때‘자기가 죽거들랑 묘 자리를 칡넝쿨이 세 발 이상 나 있는 곳에 써라’고 해서 이곳에 썼다는 것이다. 마을 앞 당호리에 葛花浮水의 명당 葛山이란 마을이 있어 무언가 연관이 있을 것 같이 여겨지나 알 수가 없다. 얼마 전까지 묘 아래에 초당이 있어 제사를 모셨다고 하나 지금은 주민이 운영하는‘거시기요’가 들어서 있고 고성정씨 제각은 뒷매 자락에 세워져 있다.

▲마제석검과 화살촉이 발견되기도
오래 전 두대산 밑으로 삼일로가 나면서 경주김씨 선산을 지나게 되었는데 공사 도중에 미이라를 발견하였다. 시체가 훼손되지 않고 온전하게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편지로 추정되는 기름종이와 당시의 생활용품도 많이 들어 있었으나 관리소홀로 현재는 아무 것도 남이 있지 않았다.

마을 동쪽에 오장골이 있다. 오장골은 골짜기가 다섯 장군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마을 서북쪽에는 덕산이 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살았으나 현재는 살고 있지 않다. 그 뒤 골짜기를 덕산골이라 한다. 마을에서 명산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당너멋재라 한다. 마을안에 종채거리도 있다. 예전에 종을 쳤던 길이다.

예전에 문임술씨 집 뒤 밭에서는 마제석검과 화살촉 등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고성 정씨 제각은 근래에 지은 것으로 시멘트 구조물인데 정면 2칸에 팔작지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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