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仙里는 청계면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2㎞ 정도 떨어져 있는 지역으로 북쪽에는 승달산이 자리 잡고 있고, 里 앞으로는 청계-일로간 815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원래 무안군 일서면 지역으로 월선 혹은 월선동이라 불려 지다가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고 1914년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낙천동 중화리 노월촌 일신동 지정 학천동 수정동 수월동 신촌 대치 일부를 병합하여 월선리라 하였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월선리는 무안의 4대명당 중 雲中囚月의 길지가 있다고 믿어지는 곳으로 전설과 명당터가 많이 있다. 그래서인지 마을 이름에 月자가 들어간 마을이 월선동 수월동 노월촌 등 세 군데나 된다. 현재 월선리는 2006년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지로 선정되어 풍요롭고 건강한 농촌마을을 가꾸고 있다.

▲4개 마을로 이루어져 석대정은 월선3리에 속하는 마을로 노월촌 석대정 한치 일신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전에는 월해 마을도 포함되었으나 지금은 청계3리에 해당된다. 노월촌은 호구총수에도 나오는 지명으로 마을 앞 갈대 속에 스며있는 달이 아름다워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진포구의 둑이 막히기 전까지는 마을 앞까지 물이 들어왔으며 지금도 갈대들이 많이 남아 있다.

석대정은 월선3리에 속하는 마을로 노월촌 석대정 한치 일신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전에는 월해 마을도 포함되었으나 지금은 청계3리에 해당된다. 노월촌은 호구총수에도 나오는 지명으로 마을 앞 갈대 속에 스며있는 달이 아름다워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진포구의 둑이 막히기 전까지는 마을 앞까지 물이 들어왔으며 지금도 갈대들이 많이 남아 있다.

입향조는 무안 박씨이며 후에 경주 이씨가 들어왔다. 이곳의 무안 박씨는 이후 석대정 한치 마을 등으로 분가하여 살았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박씨들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였던지 주변 마을에서 이 마을을 어려워했다고 한다. 또한 한국전쟁 때는 좌익 인사들이 많아 박씨들이 피해를 많이 보기도 했다.

마을에는 나주 정씨 제각인 운월재가 있으며 무안 박씨 제각인 연국당도 있다. 운월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관리가 되지 않아 주변은 잡초가 무성하고 제각은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연국당은 12개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제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970년대에 지어진 것이다.

주변에 송산골과 큰골 그리고 강씨 부자가 살았다는 강마골 고씨 부자가 살았다는 공적골이 있다. 또한 마을 입구 박씨 세장비가 있는 곳은 초분골이었으며 그 옆에 자라고 있는 당산나무는 둘레 370㎝를 자랑하고 있다.

석대정은 비석거리에서 비롯된 마을 이름이다. 현재 전조제를 지내는 장소에 당시 세도가였던 이찰방이 세운 하마비가 있었다. 원래 하마비는 대소 관원을 포함해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은 말에서 내리라는 비석인데 어찌된 이유인지 이 비가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그 곳에 있었던 것이다. 주민들은 이곳을 비석거리라 했고 나중에 현재의 이름인 석대정으로 바뀐 것이다. 현재 그 하마비는 없다.

▲비석거리는 하마비에서 비롯돼
마을 뒤에 산정뫼가 있다. 山井뫼 정상에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몽탄면 달산리 수원지의 물을 끌어다가 이곳에서 한 번 더 여과시킨 뒤 목포 시민들에게 급수하는 장치를 설치했다. 처음엔 4개의 저수조가 있었으나 광복 후 4개를 더 설치하여 8개의 저수조가 있었다.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주민들은 산정뫼를 예견지명의 전형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산정이란 지명은 조선시대부터 있어온 지명으로 산에 우물이 있었다는 것인데 실지로 일제 강점기 때 우물이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예견지명은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미리 예견한 지명을 말한다.

마을 앞에 있는 전조제의 제단은 두 개의 비석과 고인돌로 여길 수 있는 세 개의 바위가 놓여 있다. 두 개의 비석은 전조제 유래를 적은 것과 1769년에 독다리를 놓았던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진 시주비다. 세 개의 바위는 길이가 각각 310㎝ 285㎝로 나머지 하나는 조그마한 바위다. 이중 큰 바위가 제단 옆 개천의 돌다리로 놓여졌던 것인데 1980년대 시멘트 다리가 들어서면서 옮겨진 것이다.

마을회관 앞에 두 개의 비석이 있다. 오헌무안박공영호공적비와 인당김해김광호행적비다. 이중 김광호씨는 한국전쟁 때 마을 주민들의 목숨을 많이 살렸다고 한다. 당시 마을에는 4-5명의 좌익인사가 있어 마을에 이념적인 갈등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평소에 밉게 보던 인사들을 모아 처형시키려고 했는데 김광호씨가 나서 무마시켜 많은 사람들을 살려냈다는 것이다. 이때의 혼란으로 노월촌의 무안박씨 위세는 많이 꺾여졌다고 한다.

한치 마을은 마계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원래는 삼향면에 속했는데 근래에 청계면으로 다시 복귀한 것이다. 자료를 보면 호구총수에는 나왔으나 1912년의 자료엔 나오지 않고 다시 1917년의 자료에 나온다. 대치라고도 불려지는 마을인데 마을 앞으로 삼향면 장곡으로 넘어가는 긴 고개가 있다. 이 고개를 대치라 했는데 이것이 지명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치 저수지가 있다.

이곳에는 숙구(宿狗)머리라는 곳이 있는데 개가 잠을 자는 형국의 지형을 말한다. 앞에 있는 범산골의 호랑이가 잠자고 있는 개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라서 주민들은 이곳을 명당터라고 말한다. 즉 호랑이는 잠자는 개를 잡아먹지 않기 때문에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곳이 주막자리여서 번화한 자리라고 했다. 마을 앞에 당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처사 부부의 묘가 있어
일신동 마을은 1912년의 자료에는 日申洞으로 나왔으나 1917년의 자료에는 현재의 한자인 日新洞으로 나온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날로 새로워져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처음 중화 마을에서 온 경주이씨가 자리 잡았으며 후에 함양박씨가 들어왔다.

마을 가운데서 가마터로 보이는 흔적들을 발견했다. 수많은 자기 파편이 발견되고 있어 주민들도 예전에 이곳이 가마터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15가구까지 모여서 살았으나 지금은 7가구만 살고 있다.

마을 앞 길 건너에는 전조제의 또 다른 주인공 이처사 부부의 묘가 있다. 밀양박씨 선산에 자리하고 있는데 아들을 낳지 못한 사람들이 와서 참배하거나 묘를 가꾸는 공덕 등을 쌓으면 반드시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요즈음도 가끔 외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무덤을 찾곤 한다고 한다. 마을 앞 학골이라 부르는 곳에 목포중증장애인요양원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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