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해제면소재지로부터 동북쪽으로 2㎞ 떨어진 곳에 위치한 兩梅里는 매곡, 토치, 외분 등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구여동, 외분매, 금성동, 가양리, 토치리 매곡 등 일부를 병합하였으며 외분매와 매곡의 두 마을에 梅자가 모두 들어있다 해서 兩梅里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1789년에 발행된 호구총수에는 외분매동, 내분매동만 나오고 1912년에 발간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서야 가양동, 금성동, 반곡리, 매곡동, 외분매동, 내분매동 토치동 등이 나온다. 매곡 마을에는 광산김씨의 모충사, 칠효열각, 삼강비, 충열문 등이 있으며 외분 마을에는 파평윤씨 재각인 금성사와 경모재가 있으며 윤석언 효자각이 있다.

▲ 토치마을 전경

▲土峙가 아닌 兎峙로 표기해야

▲ 토치마을 양배추
토치 마을은 양매3리에 속한 마을로 1976년에 외분 금성 마을에서 분리 되었다. 원래 이 마을은 여시몰이라 불렀다. 예전에 마을 청년들이 마을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텃세를 부려 주변에서 시샘하며 불렀던 이름이다. 또한 마을 주민들이 재빠르고 재주가 있어 주변 주민들이 여시 같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란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 마을은 토치와 토치삼거리 그리고 육충뫼(할머니들은 육철뫼라 부른다)로 이루어졌다. 마을 뒤에 있는 육충뫼는 대대로 내려온 지명인데 그 의미는 주민들이 잘 모르고 있었다. 상감산을 주산으로 하고 왼쪽엔 니성산이 있으며 앞에는 길 건너 망월산이 자리하고 있다. 상감산은 양매리의 주산인데 코끼리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변엔 코끼리를 뜻하는 캐코리라 부르는 지명도 있다.

니성산은 해제면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으로 일제강점기 때 금광이 개설되었으며 해방 후에도 강원도의 삼중광업소에서 금을 10㎏ 정도 채취했다고 한다. 이 산에는 지금도 많은 금이 매장되어 있다고 주민들은 믿고 있다. 당시 채굴되었던 굴터가 4-5개 정도 남아 있는데 황금박쥐가 서식하고 있는 굴도 있다. 길 건너에 있는 망월산은 무덤이 많기로 유명하다. 달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망월산을 이방 사람들은 동산뫼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이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어서 주민들의 의견을 모으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 마을 이름은 兎峙다. 마을의 지형이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玉望月의 형국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헌데 대부분의 주민들은 土峙로 알고 있다. 하지만 담양전씨 족보나 다른 기록에는 兎峙로 나온다. 이렇게 한자표기가 변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 쓰기 쉬운 한자로 표기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금령김씨 김경태(자-예원, 호-운암. 1698-1786)다. 해제에서 금령김씨가 살고 있는 곳은 학송리 학암과 이 마을이다. 해제의 금령김씨 입향조는 金禮曄(자-四明, 호-新齋, 1550-?)으로 충의공 김문기의 6세손이다. 본래 금령김씨는 경북 상주에서 세거하였으나 김문기 공이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면서 친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예엽 공도 상주에서 진안으로 옮겨 와 숨어살다가 은거 생활 4년만에 학송리 학암 마을로 들어와 일가를 이룬 것이다.

▲양배추를 많이 심는 마을

▲ 해충퇴치기
예엽 공의 증손인 김경태가 학암 마을에서 분가하여 상감고랑으로 옮겼다가 이 마을에 정착했다. 족보에 나타난 것을 보면 경태는 통정대부에 승정원 좌승지를 역임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증직으로 보인다. 문헌으로 이 마을 역사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1912년에 가서야 토치동으로 나오고 1917년에 양매리 토치로 나온다.

마을 앞 들판 곳곳에 해충 퇴치기가 있다. 다른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인데 마을이 바다 옆에 위치하고 있고 들판이 간척지로 형성되어서 깔따구와 모기가 많이 있기 때문에 설치한 것이다. 또한 친환경 농산물 생산을 위해서 설치한 것이라고도 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여름에는 시꺼먼 모기가 극성을 부려 애를 먹는다고 한다.

예전에는 고구마와 양파를 많이 재배했던 마을 주변에 현재는 양배추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주민들에게‘왜 소득이 많은 양파를 놔두고 양배추를 심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양파는 노동력이 많이 가지만 양배추는 재배가 단순해 노인들이 재배하기 쉽기 때문에 손해를 보더라도 심는다’고 한다.

이렇다 할 역사나 문화는 마을에 전해오는 것이 없다. 예전에 농악이 성할 때는 이 마을도 건너 마을 창등 사람들과 어울려 농악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옆 마을인 외분 마을과는 심정적으로 조금 거리를 두고 있는 듯 했다.

마을 앞들을 상감들이라고 하는데 50여년 전에 간척으로 형성된 들이다. 토질이 좋아 이곳에서 생산되는 생산물의 소득이 높았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화염(火鹽)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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