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구산리는 몽탄면 소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호남선 철도와 811번 도로가 지나고 있다. 마을 앞으로 대치천이 흐르고 있어 농업용수가 풍부하다. 본래 무안군 석진면 지역으로 뒷산인 신선봉을 풍수적 지형으로 봐서 개산[狗山]이라 불렀으나 어감이 좋지 않아 구산으로 바꿨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현재의 九山이 됐다.

1910년 목포부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석현리 유곡 벽류동을 합하여 구산리라 하였다. 현재는 원구산과 유곡 마을이 있다. 몽탄기와의 고장이며 인동장씨 제각인 鏡湖齋가 있다.

▲ 원구산마을 전경

▲4개의 마을로 이뤄져

▲ 원구산마을 주민들
원구산은 구산2리에 속하는 마을로 호암동 구산 벽류동 화쟁이 등 4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개산이라 불렀던 신선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건너에 몽탄면의 주산인 건지봉이 자리하고 있다.

虎洞은 마을 뒷산에 신선봉과 그 기슭에 범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있어 부르게 된 지명이다. 처음엔 虎巖里라 했으나 일제강점기 때 호동이라 했다. 입향조는 장흥고씨 고광수인데 족보를 볼 수 없어 그의 행적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단지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공은 담양 창평에서 세거하였는데 임란 때 옆 마을 이산리 당촌으로 피난하여 살다가 이 마을로 들어왔다고 한다.

九山 마을은 뒷산의 지형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된다. 뒷산이 구좌본(狗座本)의 형세로 개가 움크리고 있는 지형이다. 실지로 마을 사람들은 건너편 건지봉의 호랑이가 마을 뒷산의 개를 노려보고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이런 지형이어서 처음엔 개산[狗山]이라 불렀으나 어감이 좋지 않아 구산으로 바꿨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현재의 九山이 된 것이다. 아직도 주변 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 사람들을 구자반 사람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마을유래지에는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어 구산이라 했다하나 단순히 한자를 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장씨들 족보에는 龜山이라 표기되었으나 이는 원래의 의미를 모르고 쓴 와전된 표기다.

이 마을은 처음엔 방씨가 거주하였지만 그 연대와 유래는 알 수 없고 장씨들의 입향조 묘가 있는 벽류동 위 시래동에서 방씨의 유물로 추정되는 물건들이 나왔다고 한다. 이후 최씨 고씨 윤씨가 살았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현재는 인동 장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장씨들의 입향조는 張文周(자-斗佑, 호-湖巖, 1659-1748, 또 다른 장씨 관련 자료에는 張學魯로 나온다)이다.

▲한때 푸른 강물이 넘실거렸던 마을

▲ 장병옥 효자각
碧流洞은 물 때문에 형성된 지명이다. 예전에는 마을 앞에 거대한 강이 있어 늘 푸른 물이 넘실거렸다고 한다. 이 강물은 대치리 한재 마을 앞까지 올라갔던 물인데 영산강이 막히면서 대치천이 대신하고 있다.

자료를 보면 1789년에 나온 호구총수에 무안현 석진면에 碧流洞리 虎巖리가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석진면에 柳谷리 石峴리 碧流동 九山동 虎동이 나온다. 1917년의 자료에도 석진면 구산리 석현리 구산동 유곡리 벽류동 호동 등이 나온다. 이어 근래의 자료인 1987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몽탄면 구산리 유곡 벽류동 호동이 나온다.

한국전쟁 때 이 마을도 피해를 봤는데 주변 사람들을 포함해서 23명이 한꺼번에 처형 당하기도 했다. 인민군을 포함한 빨치산 세력들이 후퇴하면서 협조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모두 처형한 것이다. 당시 마을 주민인 장석진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까지 처형시키려 하자 목포까지 가서 관련자들을 데려와 인민재판을 자청했다. 이 재판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도 했다.

장석진(1911 - ?)은 이 마을 출신으로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19세로 광주고보 3학년에 재학중 광주학생 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 사람이다. 무안읍에 그에 대한 공적비가 있다.

호동은 통샘 구산은 윗샘과 아랫샘 그리고 벽류동에도 샘이 있다. 그중에서 호동의 통샘 물은 맛이 뛰어나고 수량이 많아 예전에는‘물타러 간다’는 놀이가 성행했던 샘이다.

호동 마을에 일제강점기 때 세워진 교회가 있었다. 주민들 중 여러 사람이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일본인 순사들이 신사(몽탄 신사는 건지봉 중턱에 있었다)에 참배하라며 교회에 다니는 것을 압박했다. 견디지 못한 교회는 이산리로 옮겨 재건교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목회활동을 하였다. 현재 면소재지에 있는 몽탄중앙교회는 이 재건교회가 모태가 되었다.

▲몽탄기와의 생산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생산했던 몽탄기와는 널리 알려진 몽탄의 대표적인 상품이었다.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와 더불어 영산강의 수송로와 몽탄지역에서 나오는 질 좋은 점토를 이용한 향토 산업이었다. 기와공장은 이 마을에 6곳 유곡 마을에 3곳이 있었는데 현재는 한 곳도 없다. 이 기와는 경상도는 물론 제주도까지 유통되었다. 주민들은 주변에 나무가 없어 뱃길을 이용해 진도에서 나무를 실어다 화쟁이에 내려놓고 그곳에서 나무를 가져다 땔감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목포대학교 자료에 따르면 1997년 호남선 복선화 공사 때 호동 마을 뒤 신선봉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사면부에서 고분군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삼국시대 옹관묘 6기와 6-8세기 석곽묘와 석실묘1기씩 발굴했다. 또한 철제대도와 철모 등이 출토되어 이 지역에 자리 잡은 지배계층의 무덤이라고 추정하였다.

구산 마을에 1909년에 세워진 장병옥 효자각과 장씨문중의 제각인 경호재가 있으며 1971년에 개교한 몽탄중학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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