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구산리는 몽탄면 소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호남선 철도와 811번 도로가 지나고 있다. 마을 앞으로 대치천이 흐르고 있어 농업용수가 풍부하다. 본래 무안군 석진면 지역으로 구산 마을의 뒷산인 신선봉을 풍수적 지형으로 봐서 개산[狗山]이라 불렀으나 어감이 좋지 않아 구산으로 바꿨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현재의 九山이 된 것이다. 1910년 목포부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석현리 유곡 벽류동을 합하여 구산리라 하였다. 현재는 대치천을 사이에 두고 원구산과 유곡 마을이 있다. 한창일 때는 13군데의 기와공장이 있을 정도로 많이 생산되었던 몽탄기와의 고장이며 인동장씨 제각인 鏡湖齋가 있다.

▲ 유곡마을 전경

▲버드나무가 많이 있었던 마을

▲ 유곡마을 샘
유곡은 구산1리에 속하는 마을로 몽탄면소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갓재봉이라 부르는 건지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110여년이 되었으며 쇠쟁이 유곡 불당골 가는골 반곡 장터 등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마을을 가르고 811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1789년의 문헌인 호구총수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1912년의 자료에 비로소 석진면 柳谷리로 나온다. 이후 모든 자료에 유곡이 나온다.

쇠쟁이는 마을에서 내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는 새재에서 와전된 지명으로 추정되며 불당골은 불당동이라고도 하는데 예전에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불당골에서는 지금도 기와 등 생활도구 등이 발견되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주민이 밭을 경작하다가 범종을 발견하기도 했다. 가는골은 불당골 밑에 있는 골짜기로 불가와 관련된 지명인 관음골이 아닌가 여겨진다.

반곡은 반고개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지금은 811번 지방도로가 나 있어 평평하고 반듯한 길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이 마을과 사천리 만복동 사이에 건지봉에서 내려오는 한줄기 맥이 조그마한 고개를 이루고 있었다. 주민들은 이 고개를 반고개라 불렀는데 이것이 변화되어 반곡이라 부르게 됐다. 하지만 한국지명총람에는 이 마을에 밤골[栗谷]이란 지명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봤을 때 밤곡이 반곡으로 변하지 않았는가 추정해 볼 수도 있다.

장터는 40여년 전까지 있었던 터다. 원래 장터는 현재 농협창고 자리에 있었다가 사천리로 옮겼는데 다시 옛 보건소 자리로 옮겨 그 명맥이 끊겨졌다. 이 장터에는 항샘(항아리가 묻혀 있는 샘)이 있었다. 이 마을에는 유곡샘 관음골샘 등 세 개의 샘이 있었다.

유곡(柳谷)은 버드나무가 많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지형을 보면 불당골에서 내려오는 큰 계곡과 작은 계곡이 있었다. 계곡 주위로 버드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는데 이 주변 마을을 유곡 버드나무골이라 부른다(주민들 중 幽谷이라 쓰는 사람도 있다).

▲50여점이 넘는 교지를 간직하고 있어

▲ 입향조가 받은 교지
입향조는 1890년대 후반 원구산 마을에서 이주해온 인동장씨 장찬식(자-찬유, 호-난고, 1853-1911)이다. 공은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박사를 거쳐 홍문관대제학과 한성판윤을 역임한 정통관료 출신이다. 인동장씨 족보를 보면 공은 동학혁명(갑오경장) 이후 벼슬을 버리고 이 마을에 정착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유래지에는‘인동장씨 장병윤씨가 1870년경에 원구산 마을에서 농사 짓기에 편리한 이곳으로 정착하면서 마을이 번성하였다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집안의 후손 집에서 수많은 교지와 첩지를 볼 수 있었다. 무안에서는 드물게 많은 첩지와 교지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어림잡아 50여점이 넘는다. 이중에서 4점이 넘는 홍패 교지도 있었다. 교지란 조선시대에 임금이 문무관 4품 이상의 관리에게 주던 辭令을 일컫는 것으로 문과·무과의 대과에 합격하면 홍패교지, 문과·무과의 소과에 합격하면 백패교지를 준다. 마을 탐방을 통해서 많은 교지를 보았지만 홍패교지는 매우 드물었다. 추정컨대 이 집안은 구산리에 터를 잡은 이후 대대로 벼슬을 했던 집안으로 여겨진다. 기록에 따르면 문집도 있었다고 했는데 확인할 수 없어 아쉽다.

유독 이 집안에서 인물이 많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지형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인동장씨가 이곳 구산리에 터를 잡은 곳은 풍수에서 말하는 猛虎出林臥犬形의 자리다. 이는 호랑이가 숲에서 나와 들판을 응시하고 있는데 그 앞에 개가 움츠리고 있는 형국으로 지관들이 이상적으로 보는 지형이다. 실지로 인동장씨 입향조의 묘와 제각은 개가 웅크리고 있는 자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몽탄은 명산 구산 사창 등 3곳에 기차역과 주재소가 있을 정도로 번화한 지역이었다. 영산강의 어족자원이 풍부해 일찍 어촌계가 조성될 정도로 일본인들의 관심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몽탄 숭어와 명산 장어 그리고 해파리는 대표적인 수산물이었다. 이 마을에도 주재소와 우체국 병원 그리고 두 개의 주조장이 있었으며 마을 뒤 건지봉 중턱에는 일본인들의 신사가 있었다. 현재도 파출소 우체국 농협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은 구산2리와 함께 몽탄기와의 중심지였다. 기와가 번성할 때는 13개의 공장이 있을 정도로 번영을 누렸는데 시대가 변화고 가옥의 구조가 바뀌면서 이제는 한곳도 없다. 주민들 중 기와 굽는 기술을 가진 사람도 남아있지 않아 과거의 화려했던 몽탄기와의 명맥을 잃을까 염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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