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竹山里는 산에 대[竹]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일로읍 소재지에서 남으로 약 2㎞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죽산, 양지촌, 당월촌, 도장포, 영화정, 삼천동 등 6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무안군 일로면 지역이었으나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영화정리, 정월동, 도장동, 양지동, 당월촌, 사량동, 무포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월촌에 자방포 관련 영친왕궁언장비와 경선궁혁폐선정불망비가 있으며 양지촌엔 장흥고씨 제각인 경모재가 있다.

▲ 잔등산에서 바라본 양지촌 마을 전경

▲지초가 많아 붙여진 이름

양지촌은 죽산2리에 속한 마을로 주변에 지초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자료로 살펴 본 마을 이름의 한자가 시대마다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노촌면 陽之村으로 나오고 1912년의 자료엔 무안군 일로면 良芝村으로 그리고 1917년의 자료엔 일로면 죽산리 良支村으로 나온다. 최근의 자료인 1987년엔 일로읍 죽산리 陽芝村으로 나온다. 하지만 주민들은 良芝村의 표기가 맞다고 한다. 마을 입구의 표지석에도 良芝村으로 나온다. 참고로 장흥고씨 입향조를 모시는 경모재 옆에 있는 묘의 비문에는 이 마을을 遊島로 표기하고 있다.

이 마을엔 원래 황씨가 살았다. 주민들은 마을 뒤 연고 없는 고총들은 대부분이 황씨 묘라고 한다. 하지만 마을엔 황씨들이 한 가구도 없다. 현재는 장흥고씨 나주나씨 탐진최씨 등 여러 성 받이가 살고 있다.

장흥고씨 입향조는 고처대(자-만중, 호-죽포, 1651-1692)이다. 공은 기우가 청수하고 학문이 높았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이곳에 은거하여 자연을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 마을에 공을 모신 재각이 있다. 마을유래지에는‘400여년 전 광산에서 살던 장흥고씨 고처대에게 어명을 내려 지금의 이곳 陽芝村이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니 사방 30리를 다스리라는 명을 받고 정착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주나씨 입향조는 나흥경(자-희원, 1711-1771)이다. 청호리 소포 나덕명의 후예로서 주룡 마을에서 이주한 것으로 여겨진다. 탐진최씨 입향조는 최용흠(1813-1893)이다. 탐진 최씨들은 마을 앞에 간척지가 형성되면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마을회관 앞 와비에는 양지촌 마을 유래를‘조선시대 고씨 나씨 최씨 선비가 입향하여 의형제를 맺고 살면서 마을 언덕에 지초를 심고 서로를 선인과 군자 사이로 의롭게 살아오면서 마을이 시작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은 이 넘어(이너매) 저 넘어(저너매) 노랑섬 장자등 농장 새언안 등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뒷갓뫼라 불리는 언덕을 뒤로하고 走狗山이라 부르는 장흥고씨 선산을 왼쪽으로, 오른쪽은 영산강 뻘등이 있다. 마을 앞은 건네 밭이 가로 막고 있으나 그 너머에는 간척지가 조성되어 있다. 하지만 달롱개산이라고도 부르는 주구산에서 살펴보면 예전엔 이 마을이 섬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영산강을 향해서 힘차게 뻗어내린 한 맥으로 보인다.

▲우렁막음창골창이었던 마을

▲ 구주산에서 바라본 새언안 들
마을 오른쪽에 있는 장자등은 포구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이 주민들의 식량을 강제로 뺏어 자기 나라로 보냈던 수탈창구였으며 50년대 60년대에는 주민들이 수산물을 잡아서 또는 짚으로 마람을 엮어서 목포로 팔러나갔던 경제통로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어려웠던 시절 목포시민들의 인분이나 퇴비 등을 실어와 거름으로 활용해 다른 마을보다 농사를 기름지게 경작해 아이들을 교육시키게 만들었던 고마운 항구이기도 하였다. 당시 길 옆에는 인분을 숙성시키기 위한 구덩이들이 많이 있었다. 현재는 이 포구 앞에 택지가 조성되고 있다.

노랑섬은 黃島라고도 한다. 누런 소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예전에는 아름드리의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엔 누리섬이라고도 표기되었다.

주민들은 이 마을을 우렁막음창골창이라 불렀다. 그만큼 외지고 구석진 곳에 있다는 말이다. 지도로 보아도 일로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간척이 되기 전에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형의 지세였다. 하지만 지금은 들판 건너에 도청이 들어서면서 상전이 벽해 되고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말이 실감나는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이 생활고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마을 앞에 간척지가 형성되고서 부터이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 망월리의 전주이씨와 광산에서 이사 온 장흥고씨들이 마을 앞 바다인 장호를 조금씩 매립하다가 더욱 확대하여 제방을 쌓았다. 사양동에서 주구산까지 매립하여 만든 땅은 70여 정보 되는데 새로 제방을 막아서 생긴 땅이라는 의미로 지금도 새언안들이라 칭한다. 새언안들은 도장포 영화정 앞의 간척지들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는 목포에 사는 미야끼가 오오까상에게 마을 앞 뻘밭을 인수 받아 장자등과 망월리 사양동의 긴섬(장도)를 연결하여 제방을 쌓고 30여 정보 규모의 봉곡농장을 형성했다. 당시 소작 농가는 180여호 였는데 광복 후 300평 규모의 2필지씩 주민들에게 불하되었으며‘농장’이란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이렇게 지리적으로 외지다보니 한국전쟁 때는 피난지였다. 목포에서만이 아니라 북쪽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주민들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세대별로 번갈아 가며 피난민들에게 밥을 해주었다고 한다. 마을 잔등에는 입향조가 이주 당시 심었다는 동백나무 두 그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물이 귀한 마을이다

▲ 구조가 특이한 양지촌마을 경모재
일제강점기 때는 이 마을에 유명한 학자가 있어 서당을 열었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광암리에서도 배우러 올 정도로 널리 알려진 훈장이었다. 아쉽게도 그 분이 남긴 문집 같은 것을 볼 수가 없어 그분의 학문적 역량을 구전으로만 들을 뿐이다.

청호리 망월리도 그렇지만 이 마을도 바닥이 바위층이어서 물이 귀했다. 해서 조금만 가물면 물 때문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물 때문에 이 마을에서는 축산을 하거나 원예작물을 재배하기가 어렵다.

마을 입구 주구산 아래에 장흥고씨세장비와 열부함평이씨기행비가 있고 마을회관 앞에 1980년에 세운 열부무안박씨절행비가 서 있다. 주구산 기슭에는 장흥고씨 제각인 경모재가 있다. 1962년에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입향조인 고처대 공을 모셨으며 현판도 하나 걸려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큰밤나무골 작은밤나무골 동각잔등 건네밭 뒷묏갓 솔각끔 등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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