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바의 뿌리를 찾아서-1 <김대호 성화대학 겸임교수>

(주)무안신문사에서는 지난 4회에 걸쳐 연재한‘일로품바의 역사적 고찰과 자원화’에 대한 특집을 연재했다.

이어 앞으로 2회에 걸쳐 일로품바의 뿌리로 추정되고 있는 인도의 사당패 밀교아쉬람과 인도의 품바 바울(baul)에 대한 현지 보고서를 게재한다.

본 원고는 성화대학 김대호 교수가 지난 2009년 겨울부터 2010년 봄까지 인도 웨스트벵갈주에서 3개월 간 직접 취재 한 내용으로 오마이뉴스에 발표된 것을 새롭게 재구성했다. <편집자주>

광기, 광기, 우리는 모두 미쳤나니!/'미친다'라는 말은 왜 이다지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나?/가슴속 물길 속으로 뛰어들 때, 당신을 알리라./미친 이 보다 훌륭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바울(baul)과 무슬림품바 포키르의 배틀을 보다.

축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친구 수지따는 나이롱극장 옆 비닐포장을 둘러친 허름한 폐 창고 건물로 우리를 안내한다.

장막을 걷는 순간, 나는 거기서 기이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났다. 인도의 품바 바울(baul)이었다. 주황색 혹은 조각 천으로 기운 옷을 입고 해금과 비슷하게 생긴 엑따라와 손풍금을 연주하며 마치 주술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순간 1400년 신라 서라벌의 미친 중(?)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거리를 쏘다닌 대안대사와 삼태기를 뒤집어쓰고 춤을 추었다는 혜공대사, 술에 취해 광대들 가지고 노는 큰 박으로 악기를 만들어 두드리며 무애권선가를 부르고 무애무를 추었다는 원효대사를 만나고 있었다.

광기, 광기, 우리는 모두 미쳤나니!/'미친다'라는 말은 왜 이다지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나?/가슴속 물길 속으로 뛰어들 때, 당신을 알리라./미친 이 보다 훌륭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바울의 노래 중에서)>

‘나무와 꽃과 새들의 이름이 다르듯/세상의 만물에 모두 다른 정령이 깃들어 있는데/어찌 신이 하나라고 하는가?’

바울은‘batula’(산스크리트어 Vatula)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바람에 사로잡힌 자’.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삶과 생각 모두를 내면의 근원적 충동에 내맡긴 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은 광적이다. 마치 미친 자처럼 노래하고 춤을 춘다. 마치 약에 취한 듯 내뱉는 그들의 격정적 광기는 신이라는 절정에 이르러 불나비처럼 산화한다.

카스트라는 엄격한 계급이 지배하는 인도. 어느 카스트에도 속하지 않는 웨스트벵갈 수행자 무리 바울. 캘커타의 소띠곤자아끄축제에서 인도의 품바 바울(baul)을 처음 만났다. 바울의 무리에는 브라만에서 수드라, 외국인까지 없는 계급이 없다. 남녀 구별도 없다. 누구나 평등하다. 심지어 브라만 여자와 수드라 남자와 결혼을 하기도 한다. 엄격하게 구분하면 불가촉천민이라는 외국인도 상관없다.

여기에서도 신라의 카스트제도인 골품제도의 족쇄에 묶여 능력이 있어도 사회진출을 저지당했던 6두품 출신의…대안혜공원효대사의 번뇌를 만날 수 있었다.

이날은 무슬림 바울인 포키르(fakir, 수행자 고행자)도 같이 공연을 했다. 바울들과 포키르들은 신과 깨달음에 대한‘배틀’을 벌였다. 관객들은 자신들의 신에 대한 공연자들의 노랫말을 듣고 무릎을 치거나 추임새를 넣기도 했고 흥에 겨운 이들은 ‘호리볼! 호리볼!’(신을 경배하라는 뜻의 추임새, '얼씨구 지화자'와 같은 것)을 외치며 춤을 추었다.

‘해도 하나 달도 하나/세상의 진리가 둘 일 수 없듯이/ 신도 하나 알라뿐이다.’
<포키르의 노래 중에서>

‘나무와 꽃과 새들의 이름이 다르듯/세상의 만물에 모두 다른 정령이 깃들어 있는데/어찌 신이 하나라고 하는가?’
<바울의 노래 중에서>

유일신을 섬기는 무슬림과 힌두교의 다신주의의 충돌은 계속 이어졌다. 힙합 배틀 처럼 상대 공연자에 따라 공연자를 배치하는 신경전도 이어졌다. 노래가 좋은 사람, 춤을 잘 추는 사람, 악기를 잘 연주하는 사람, 깨달음이 깊은 사람 등등 상대 공연자에 따라서 자기 쪽 공연자를 배치했다. 배틀에 따라 자신들이 밀렸는지 우세했는지 관객들의 반응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다. 래퍼처럼 대기하고 있는 상대 공연자들 앞으로 다가가 훈계조로 자신의 신앙과 깨달음을 노래하기도 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기도 하고 고개를 가로 젓기도 한다.

우리도 불교도와 개신교도가 신의 존재와 깨달음을 놓고 노래와 춤을 통해 배틀을 벌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너무나 경건한 한국사회의 종교들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일 것이다.

여기서는 전륜성왕론(轉輪聖王論)의 관점으로 왕권이 곧 불권(佛權)이었고, 정치적 입장에서 불교의 계율을 심각하게 왜곡했던 신라의 귀족불교에 대한 6두품 승려들의 조롱을 볼 수 있었다.

새벽녘에 가까워 오자 우리로 치면 인간문화재급이 되는 60대들의 원로 바울과 포키르들의 배틀이 벌어졌다. 무게와 중압감이 느껴지는 느린 춤사위에 심오한 철학적 화두들이 튀어 나오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울고 웃었다. 노래라는 방식 외에는 그 어떤 충돌도 없었다. 소수파인 무슬림들이 힌두교도들에게 자신들의 신을 알리는 최고의 선교 방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장 낮은 자들의 언어와 춤으로 가장 낮은 자들의 소통공간인 시장에서 깨달음을 설파하던 신라의 밀교승들이 다시 떠올랐다. 심지어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은‘이두’라는 백성들의 문자를 만들지 않았던가.

▲춤과 노래로 깨달음을 전하는 미치광이 수행자

알라든 예수든/ 모세든 칼리든/부자든 가난하든/성자든 바보든/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하나며 똑 같다.
공연이 무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최고로 깨달음이 깊고 음악성이 뛰어나‘바울이 왕’이로고 까지 칭송되는 삼랏(Samlat, 경지에 오른 수행자 혹은 명인)‘고울떼빠(남, 65세)’가 있는 천막에는‘빠골’(바보라는 뜻, 출가를 결단하지 못하고 바울공연마다 쫒아 다니는 열성팬을 바울들이 일컫는 속어)과 젊은 바울들이 바글거린다. 포키르들도 고개를 숙이고 경청한다. 그의 음유시에 넋을 잃는다. 음식을 사다가 드리기도 하고 시주를 하기도 한다. 음식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눈다. 엄마의 뒤를 따라 바울의 길을 선택한 막내바울 로끼(15세, 여)는 무대에 서지는 못했지만 우리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준다.

일부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날을 새워 공연을 즐긴다. 혹자들은 인도의 젊은이들은 멜라(축제)를 위해 1년 내내 돈을 모으고 나이가 들어서는 죽어 바라나시에서 화장할 장례비를 모으기 위해 산다고들 한다.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에게 현생은 잠시 머무르는 여행 같은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미래를 설계하거나 저축을 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인도에서 축제를 즐기는 것은 신을 향해 다가가는 몸짓 같은 것이기에 생업을 중단하고 축제에서 노숙하며 몇 날 며칠을 보내는 것은 흔한 모습이다. 우리나라라면 사회문제가 될 일이다. 술을 마시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인도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부끄럽고 추한 일이다. 신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일이다.

알라든 예수든/ 모세든 칼리든/부자든 가난하든/성자든 바보든/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하나며 똑 같다.
<바울의 노래 중에서>

사실 바울의 신의 실체는 힌두교의 비쉬누도, 시바도, 크리슈나도 아니고 무슬림의 알라도 아니다. 기독교의 여호와도 아니고 불교의 싯다르타도 아니다. 오직 자신의 내부 심연 깊숙이 숨어 있는 신성(神性)을 발견하고 끌어 내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 속해 있다. 내부에는 다양한 종교인들이 양존한다.

중앙권력에서 밀려나 소외된 신라의 지방호족들과 6두품 지식인들에게는 이 얼마나 혁명적인 메시지인가? 당나라 장안에서 구마라집과 선무외삼장을 만나 춤과 노래와 불법을 전수받고 있는 대안과 혜공대사의 표정이 연상된다.

‘신에 취한 미치광이 혹은 헛되이 꿈을 쫒는 거렁뱅이’라는 뜻의 바울은‘춤과 노래의 형식’으로 깨달음을 전하는 인도의 품바각설이이다. 이들은 조각보를 덧대고 꿰매서 만든 로브(robe)라는 옷을 지어 입거나 주황색 옷을 즐겨 입는다. 조각천이 모아져 한 벌의 옷을 이루는 것은 모든 종교와 삼라만상이 인간과 관계를 형성해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조각 천을 이어 붙여 입고 다니는 선승들이나 품바들의 의상과 비슷하다. 다만 현대의 품바들은 주황색 옷을 입지 않는다. 인도에서 주황색은 수행자임을 상징한다.

깨달음을 설파하는 사람, 각설이(覺說理). 바래고 찢겨져 여기저기 기워 입은 옷 한 벌에 밥 얻어먹을 그릇과 숟가락 하나면 족하다. 그것이 밥통이자 악기였다. 그들은 구걸하지 않았다. 장터와 잔칫집을 떠돌며 가난한 민초들 앞에서 선비들의 나라를 조롱하고 세상의 이치를 들려주었다.

바울들도 무리를 이루어 아쉬람(밀교)을 구성하기도 하고 홀로 시장과 잔치 집, 거리, 터미널, 기차를 떠돌며 공연을 해주며 탁발을 한다. 그들은 노래와 춤과 사설의 형태로 깨달음을 전하고 밥을 얻어먹었다. 우리의 각설이와 비슷하다. 깨달음은 전하지 않고 저질 사설이나 늘어놓는 장터와 축제의 품바는 진정한 품바가 아니다.

동행한 한국의 유일한 바울 나무는‘생사를 벗어난 진리의 세속화, 원효대사의 무애가와 무애춤 같은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와‘디티람브(dithyramb,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합창찬가)’가 그랬을 것이다. 그들의 노래와 춤은 바울의 수행이고 대화의 표현방식이다. 바울의 노래를 알지 못했다면 노벨문학상을 받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시적 영감의 원천도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타고르의 문학은 바울의 깨달음의 노래와 춤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일부 바울들은 우리나라의 원효대사의 무애가(無碍歌)부터 시작해서 사당패나 각설이까지 바울이 뿌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삼국유사에는 원효가 파계하여 설총을 낳았을 때 광대들이 두드리고 노는 바가지를 무애라 칭했다고 한다. 이는 화엄경의 일체무인 일도출생사(一切無人 一道出生死 일체의 구속됨을 버린 사람은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다. 노래 부르고 춤추는‘미친 중’원효는 이 무애(바가지)를 들고 두드리고 노래하고, 여기에 밥 얻어먹으며, 마을을 떠돌아 사람들에게 불교를 널리 전했다. 이때부터 불교는 귀족과 기득권의 종교가 아니었다. 어쩌면 바울과 똑 같을까 신기하기만 했다.

▲사람 안에 신성(神性)만 있을 뿐, 神도 경전도 없다.

바울은 경전이 없다. 따라서 수행의 비밀과 결과물은 노래에 담는다. 그 노래 또한 즉흥적이고 충동적이며 광기에 가득 차 있다. 그때그때마다 깨달음의 내용이 다르므로 같은 노래를 다시 부를 일은 없다. 한편의 시(詩)를 64가지 이상으로 부를 수 있어야 진정한 바울로 평가 받는다. 그래서 모든 바울은 시인이자 철학자이다. 악보도 없다. 모든 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수천년 동안 그래왔다. 그래서 스승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승복을 입을 수도 경전을 욀 수도 없었던 승려들이 비밀스럽게 제자들에게 경전을 가르치고 거리에서 민초들의 언어와 춤으로 깨달음을 설파하던 모습과 흡사하다.

그들의 춤도 형식이 없었다. 캥거루처럼‘통통’뛰기도 하고 중심을 잃은 것처럼 흐느적거리기도 한다. 한쪽 다리를 잃은 방아깨비처럼 그 자리를 뱅뱅 돌기도 한다. 그들의 내면에서 이는 신성과 깨달음의 카타르시스를 즉흥적이고 광적인 절정으로 표현한다.

바울의 악기는 우리의 해금과 흡사한 외줄 악기인 엑따라가 기본이다. 그밖에 둑기, 아논도 꼴로딸, 로호리, 도따라와 같은 악기도 같이 연주된다. 수행자의 음악이 은은하고 잔잔해야 한다는 내 생각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난잡하고 시끄럽다. 정신 사납고 사람을 왠지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때로는 두통이 밀려오기도 한다. 바울의 악기는 사람의 심연에 자리 잡은 신성을 깨우고 끄집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 불편함에서 시작되는 격정이 이성뿐만 아니라 본성을 깨우는 것 같다.

인도의 축제는 시작은 있으나 끝나는 날이 정해져 있지 않다. 관객들이 돌아가야 끝난다. 1주일 열릴 거라던 조이뎁 멜라(축제)는 한 달 넘겨서 끝이 났다. 갠지스 강가에 200∼300개의 무대가 들어서고 관객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쉬람과 바울들을 찾아간다. 화장실이나 식수대 같은 기본시설은 전무하다. 강 모래사장은 온통 지뢰밭(?)이다.

마치 들에 단을 쌓고 설법을 하던 우리 불교의 야단법석을 보는 듯하다.

사생활을 중요시 여기는 개인주의자이자 합리주의자인 나는 한국에서는 편리했다. 그러나 그것이 인도에서 얼마나 불편하고 비정상적인가를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거처이자 공동체인 밀교아쉬람을 찾아가 같이 생활해 보기로 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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