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품바의 뿌리를 찾아서<김대호/성화대학 겸임교수>
1. 품바의 장소성과 대승불교의 한반도 전래경로

지난 2월19일 무안군 청계면 도대리 일로품바전수관에서는 ‘일로품바 활성화와 자원화에 대한 워크숍’이라는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성화대학 김대호 겸임교수의 사회로 이윤선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교수의 ‘품바와 무안, 장소화 전략’이라는 기조발제를, 정유철 전남일보 논설위원, 박관서 다도해문화예술교육원 원장, 정삼조 남도문화디자인연구소 소장, 김승덕 품바4대 고수의 토론이 이어졌다.

이날 토론회를 통해 일로품바의 발전전략에 앞서 두 가지 과제가 무안군에 주어졌다.

‘일로품바는 한국품바를 대표할 수 있는가?’와 김시라의 연극품바와 난장품바 중 어떤 형식을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주)무안신문사에서는 일로품바의 글로벌 관광자원화를 위해 반듯이 해결해야 할 ‘품바의 대표성과 장소성’ 문제와 ‘일로품바의 자원화 전략’에 대해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이에 따라 김대호 성화대학 겸임교수의 일로품바의 역사적 고찰과 자원화를 주제로 원고를 4회에 걸쳐 게재한다.<편집자주>

영산강역사문화권을 비롯한 남도의 문화적, 인문역사적, 장소적 공간 설정은 아주 민감한 문제다. 이 문제를 해소하는 것은 무안군이 보유한 주요한 문화키워드이면서 자원화에 한계를 보이고 있는 일로품바와 분청사기, 배상옥장군, 초의선사 등을 부각시키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또한 이는 최근 자치단체 간 스토리텔링을 통한 역사문화자원 선점 전쟁과 맞물려 있는 만큼 영산강역사문화권 범주에 속해있는 나주, 영암, 해남, 진도, 신안군 등이 광의적인 접근보다는 치열한 각축을 벌일 가능성도 농후하다.

덧붙여 일찍부터 품바의 자원화를 선점하고 있는 충북 음성군과 2년 전부터 품바명인대회를 개최하고 있는 전북 고창군 문제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따라서 대승불교와 무안군, 일로품바의 연관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정사는 물론 향토자료, 야사, 전설 등을 종합적으로 망라해 새롭게 재구성해 본다.

◆무안 VS 음성 VS 고창의 품바원조 전쟁

충북 음성군은 1910년 금왕읍 무극리에서 태어난 걸인들의 대부 최귀동씨의 삶을 품바와 연결시켜 12회째 ‘음성품바축제’를 열고 있다.

후발주자인 무안군의 경우 2006년 일로품바보존회 발기인 모임을 조직하고 현재 사단법인 일로품바보존회를 중심으로 6회 일로품바명인대회와 일로품바페스티벌을 준비 중에 있다.

그동안 일로품바보존회에서 제시했던 ‘정통성’의 근거는 일로전통시장 인근 천사촌의 천장근씨(?~1973년)와 이를 연극적 형태로 발전시킨 일로출신 김시라씨(1945~2001)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기록에 의한 품바(혹은 각설이)의 역사는 그보다 수 백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초 눌재집(訥齋集)에 기록된 양성지(1415-1482)의 상소문에는 ‘백정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작악개걸자(作樂乞者) 즉 저자에서 음악을 연주하면서 떠돌며 구걸하는 자’의 단속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그 당시 백정은 도축을 담당하는 천민이 아니라 경작지를 받지 못한 농민이다. 3회 원고에서 서술하겠지만 백정과 작악개걸자의 만남을 경계하는 것으로 일로품바의 정통성과 밀접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가깝게는 신재효(1812~1884)의 판소리 사설 중 ‘흥보가’와 ‘변강쇠가’에는 각설이패의 등장뿐만 아니라 <장타령> 다시 말해 <각설이타령>까지도 문자로 정착되어 있다. 이런 근거로 신재효의 고향인 전북 고창군에서는 2회째 품바명인대회를 개최하고 품바자원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따라서 출생기와 활동기가 겹치는 ‘천장근’과 ‘최귀동’이라는 인물로 품바의 정통성과 연결 짓는 것은 상당한 억측이며 이를 놓고 본다면 두 자치단체 모두 품바의 대표성과는 거리가 멀다. 고창군 또한 신재효의 고향이라는 관점에서 판소리에 대한 자원화에는 의미는 있겠지만 품바의 역사성과 장소성 부분에서는 다소 무리한 연결일 수 있다.

◆품바의 뿌리는 신라 대승불교 승려들의 만행(漫行)

헐벗고 배고픈 이, 옷과 밥을 주었으라/ 앓는 이 구안하고 약한 이 도와주니/ 모두 보시행이로다/ 재물이 없다 한들 몸조차 없을 건가
<중략>
성인은 그 누구며 범부는 그 누구냐/ 유정(有情) 무정(無情)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한 마음으로 나툰 중생 불(佛) 아닌 이 어디 잇나/ 미(迷) 할제 범부러니 깨달으니 불이로다
<중략>
어허 기쁜지고 지화자 좋을시고/ 법고 둥둥 울려 한바탕 춤을 추자/ 니누나누 늴리리/
나무아미타불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을 이끈 도법스님은 2009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오늘날 불교 수행은 역사적 현실·현장과 괴리된 채 은둔해 있다. 정적인 수행을 답습할 게 아니라 삶의 현장을 떠도는 새로운 수행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결론적으로 ‘대승불교의 흥망성쇠와 승려들의 거리에서의 참선’에 일로품바의 뿌리가 있다.

1,400여 년 전 ‘거리에서의 참선’ 즉 저자거리에서 온갖 기행을 일삼으며 만행(漫行)을 한 3인의 스님들이 있었다.

삼국유사 원효장(元曉章), 대각국사 문집, 송고승전 4집 원효전 등에 따르면 신라의 대안대사(571~644)는 괴이한 옷차림을 하고서 항상 저자거리에서 구리 밥그릇을 두드리며 ‘두루두루 편안하라’는 뜻의 ‘대안(大安) 대안’을 외치고 다녔다. 혜공대사(惠空, 632-646)는 자주 술에 취한 채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와 춤을 추어 사람들이 그를 부궤화상(負櫃和尙)이라 불렀다. 원효대사는 거리에서 술에 취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는데 이를 무애무와 무애권선가라고 부른다,

원효대사의 ‘무애권선가’는 빈부계급의 문제를 타령의 주요 화제로 이끌어 가는 품바타령과 의미뿐만 아니라 가사의 맥락에서도 상당 부분 일치한다.

헐벗고 배고픈 이, 옷과 밥을 주었으라/ 앓는 이 구안하고 약한 이 도와주니/ 모두 보시행이로다/ 재물이 없다 한들 몸조차 없을 건가
<중략>
성인은 그 누구며 범부는 그 누구냐/ 유정(有情) 무정(無情)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한 마음으로 나툰 중생 불(佛) 아닌 이 어디 잇나/ 미(迷) 할제 범부러니 깨달으니 불이로다
<중략>
어허 기쁜지고 지화자 좋을시고/ 법고 둥둥 울려 한바탕 춤을 추자/ 니누나누 늴리리/
나무아미타불

<원효대사 무애권선가 중에서>

▲ (사)일로품바보존회에서 재현해 10월에 공개할 예정인 품바무애무 연습장면
이들은 모두 신라의 대표적인 대승불교의 승려들이었다. 뒤를 이어 혜통대사는 당나라로 건너가 중국 대승불교를 집대성한 인도의 밀교승 선무외삼장(善無畏三藏, 637∼735)을 만나 수학하게 된다.

이와 달리 안타깝게도 백제 대승불교의 기록은 ‘청관음경과 불신주경 두 권의 책과 백제 제27대 위덕왕(525~598) 때 대승불교의식을 행하는 주금사를 577년에 일본에 파견했다.’는 내용이 일본서기에 기록된 것 외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인도불교는 475년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굽타왕조의 쇠퇴,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남하와 북상을 거듭하게 되는데 이것이 후일 남방불교와 북방불교 형태로 발전한다.

파라왕조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인도 밀교는 1199년 왕조의 몰락으로 지방종교로 전락한다. 1203년 이슬람교의 이크티야르 웃딘 무하마드장군이 밀교 마지막 근거지 비트라마시라사(寺)를 쳐들어가면서 밀교는 인도역사에서 사라진다.

2호 원고에서 언급하겠지만 이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대승불교의 마지막 근거지인 몽탄의 총지사가 조선정부의 비호 아래 유림들에 의해 방화로 철저하게 파괴되어 가는 과정과 흡사하다.

그러나 인도불교의 북상과정인 7~8세기에 이미 구마라습, 선무외삼장 등 인도 불교철학자들은 중국 당나라의 장안으로 가 금강계와 태장계의 대승불교를 전했다. 이때에 신라 유학승 혜통혜초스님도 선무외삼장에게 대승불교를 전수받게 된다. 대승불교는 8세기 이후 티베트와 네팔에 전해져 라마불교로 발전하게 된다.

◆무안은 대당 항로 중심포구 아니었다. 그러나…

▲ 경주→나주 영산포→영암 구림 당포→압해도→안창기자해역(현재 안좌도)→도초하의 해역→우이도→흑산 사리 혹은 진리(중간 기착지)→홍도 대풍리→동남품을 타고 북상→군산 어청도→중국 대련 <신라-당나라 간 해상 항로>
그렇다면 1400여 년 전 신라 대승불교와 무안군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당시의 대당 항로를 파악하는 것은 인도 대승불교의 한반도 유입경로를 파악하는데 주요한 사료가 될 것이다.

당시 신라에서 당나라로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도보를 통해 고구려를 경유하는 방법이 있었고 또 하나는 해상항로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육로는 시일이 많이 걸리고 삼국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선호하지는 않았다.

중국과 한반도에는 크게 4개의 항로가 있었는데 황해중부횡단북해로, 황해중부횡단남해로, 동중국해사단해로, 황해남부사단해로 등이다.

특히 동중국해 사단해로는 중국에서 고려로 올 때 이용했는데 대련, 명주를 출발해 주산열도 앞의 보타도로 나와 비스듬히 사선으로 고려를 향해 북상한 다음 흑산도와 군산 앞바다의 고산군도나 어청도를 지나 목적지를 향하는 뱃길이다.

중국 송나라 문신 서긍이 인종(1123년)때 고려에 와 한달 간을 체류하면서 쓴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따르면 ‘5~8월 사이에 부는 남동풍을 타고 명주를 출발, 주산군도 앞바다에서 사선으로 황해 남부를 횡단 북상해 개경의 벽란도항에 도착하는데 20일이 걸렸으나 상선(商船)은 순풍일 때 7일이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를 뒷받침한다.

해상항로는 나침반이나 별자리를 보고 해류와 바람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신라 경주에서 복잡한 해안구조를 가진 남해안을 이용하는 것의 사실상 불가능 했다.

당시 해상항로는 크게 두 곳에서 시작되는데 영암군 구림의 당포와 강진군 대구의 당포(당전)이다. 강진항로는 지금의 남해 고속도로를 통해 도보로 이동하고 대구면 당포에서 배를 타는 방법인데 주로 화물운송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으므로 가능성이 약하다.

당시 귀족들이나 승려, 유학생들이 사용하던 대당경로는 지금의 88고속도로를 통해 도보로 나주 영산포에 이르고 소형선박을 이용해 영암군 구림 당포로 이동 국제선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점이 남는다. 인도 대승불교의 한반도 유입경로는 해소되지만 당시 대당교역의 중심 포구가 영암 구림의 당포이고 나주가 중앙정부의 행정적 중심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일로품바의 뿌리인 대승불교의 전래지가 무안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해지고 장소성 문제는 나주시와 영암군의 몫으로 넘어간다. 다음호에는 대승불교가 왜 영암군과 나주시가 아닌 승달산을 거점으로 무안군에 뿌리 내렸는가를 중심으로 원고를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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