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품바의 뿌리를 찾아서<김대호/성화대학 겸임교수>
3. 한국 대승불교 토착화와 몰락 그리고 일로품바의 탄생

 

지난 2월19일 무안군 청계면 도대리 일로품바전수관에서는 ‘일로품바 활성화와 자원화에 대한 워크숍’이라는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성화대학 김대호 겸임교수의 사회로 이윤선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교수의 ‘품바와 무안, 장소화 전략’이라는 기조발제를, 정유철 전남일보 논설위원, 박관서 다도해문화예술교육원 원장, 정삼조 남도문화디자인연구소 소장, 김승덕 품바4대 고수의 토론이 이어졌다.

이날 토론회를 통해 일로품바의 발전전략에 앞서 두 가지 과제가 무안군에 주어졌다.

‘일로품바는 한국품바를 대표할 수 있는가?’와 김시라의 연극품바와 난장품바 중 어떤 형식을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주)무안신문사에서는 일로품바의 글로벌 관광자원화를 위해 반듯이 해결해야 할 ‘품바의 대표성과 장소성’ 문제와 ‘일로품바의 자원화 전략’에 대해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이에 따라 김대호 성화대학 겸임교수의 일로품바의 역사적 고찰과 자원화를 주제로 원고를 4회에 걸쳐 게재한다.<편집자주> 
 

동냥‘승려들의 탁발행위’…호남 최초의 시포 일로장

▲국사에서 노비까지 한국불교의 중흥과 몰락

 신라는 8세기 말에 이르러 지배계급의 내분과 골품제도에 불만을 품은 6두품 중심의 신진승려지식인 그룹과 지방호족의 발호로 혼란에 빠져 든다. 중국 유학승들은 대승불교의 화엄종 등을 전수받고 돌아와 혼란기 유력세력으로 성장한 지방 호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세를 확장해 갔다.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에 이르러 중국 남종선의 거봉인 마조도일(馬祖道一 707~786) 계통의 법맥을 전수받은 승려들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세웠으며 경전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과 마음으로 진리를 전해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이심전심(以心傳心)견성성불(見性成佛) 같은 혁명적인 개념들을 받아들인다. 이는 출가를 독점하며 교학 중심의 사회질서를 유지해 오던 경주의 승려들과 귀족왕족들에게는 크나큰 위협이었다.

결국 유력한 지방호족이었던 왕건은 풍수지리설 등을 주창한 도선국사 등 새로운 불교세력과 연합해 천년왕국 신라를 무너뜨리고 고려를 세웠다. 또한 ‘훈요십조’를 통해 불교를 고려왕국의 정치사상적 근간으로 삼는다.

또한 신라 때 주류를 이루었던 교학승들의 이탈을 막고 불교를 제도권으로 흡수하기 위해 국가고시인 승과제도를 도입해 법계(法階)를 수여하였으며 왕사(王師)와 국사(國師)제도를 두어 국가종교로서 위치를 확고히 한다.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불교가 제도권으로 흡수되어 관료조직화 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후일 사상적 퇴보와 함께 도덕성의 붕괴로 이어지게 된다.

덧붙여 선종과 교종의 대립 또한 첨예했는데 이는 정치적 갈등으로 까지 진화해 또다시 거리에서 노래와 춤을 지어 부르며 백성들을 선동하는 무리들이 생겨나게 된다. 이는 신라에서 새로운 사회질서를 모색했던 대안혜공원효 등과 비슷한 방식으로 고려정부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정부는 화엄종 승려였던 문종의 4남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을 통해 다른 종파인 천태종을 중국으로부터 재수입해 고려 천태종을 세우고 교학위주의 종파들과 수행위주의 선교를 통합하려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선교에 대한 차별로 반발은 더욱 거세졌으며 구산선문은 조계종(曹溪宗)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해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에 의한 새로운 선교의 융화가 추진되게 된다.

결국 순천 송광사를 중심으로 세를 넓힌 보조국사 지눌은 청자와 대당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강진의 유력호족 최씨가와 결합해 고려정부를 무력화 시키고 무신정권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후 불교는 선을 우위로 교를 흡수하는 양상으로 국가권력을 확고히 장악한다.

그러나 조선조에 이르러 신진사대부를 세력기반으로 하는 정부는 서서히 숭유억불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태조는 군역면제자인 승려 수를 제한하고 세원확보를 위해 도첩제를 실시하면서도 조선건국을 도왔던 무학대사를 왕사(王師)로 세우고 수륙회(水陸會 물이나 땅위에 음식을 던져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법회)를 여는 등 불교청산이 아닌 부패근절에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태종은 국사왕사제도를 폐지하고 11개 종단을 7개로 통합하였으며 사찰의 재산을 동결하고 사전(寺田)을 몰수하였다. 또한 공인사찰(公認寺刹)로 242사(寺)를 정하고 나머지 사찰에 대해 폐찰에 들어갔으며 도첩제를 강화해 승려들을 환속시켜 세원을 확대함과 동시에 불교세력 약화에 착수한다.

세종은 초기 7개 종단을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하고 법정사찰을 36개로 줄였다. 또한 한성부 토목공사에 승려들을 동원하고 이후 승려의 도성 내 출입을 금지했다. 그러나 후기 불교의식을 행하는 공작재를 궁내에 짓고 훈민정음으로 불교 서사시 ‘월인천강지곡’을 짓기도 했다.

불교세력의 초토화에 나선 것은 성종이었다. 불교를 믿던 훈구파를 정리하기 위해 사림파를 대거 등용, 본격적인 유교정치에 나섰는데 사찰 수색령을 내려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색출하고 나중에는 간경도감과 도첩제까지 폐지해 출가를 완전히 금했다. 연산군은 승과를 폐지하고 승려를 관노로 삼았으며 사찰의 재산을 몰수하고 선교 양종의 본사도 폐찰 시켜 승려들은 결국 노비와 같은 존재로 전락했다.

▲비밀결사조직으로 저자에 나선 조선불교

조선 초 조정은 유랑생활을 하며 특수한 마을을 형성해 무장을 하고 백성들이나 관가를 습격하던 양수척(陽水尺) 혹은 화척(禾尺) 문제로 골머리를 안는다. 조선은 이들을 북방민족 즉 오랑캐의 귀화인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원에 항복한 고려정부가 삼별초를 오랑국 즉 오랑캐의 나라로 불렀듯이 지도부를 잃은 고려의 잔존세력일 가능성도 있다.

세종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화척들을 백정에 편입시켜 평민대접을 해준다. 백정은 수(隨)나라에서 백성을 일컫던 말로서 조선 초 까지는 천민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토지를 받지 못한 특수한 계층의 농민이었다.

이런 추론이 가능한 것은 조선 성종(1457~1494) 때 눌재 양성지(1415-1482)의 ‘백정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악개걸자(作樂乞者, 저자에서 음악을 연주하면서 떠돌며 구걸하는 자)를 단속해야 한다.’는 상소를 통해서다.

역대 탄압기 불교는 밀교적 색채를 띠고 저자에서 노래와 춤으로 백성들을 선동해 세력을 키웠다. 불교의 비밀 결사조직이 소위 화척, 백정이라 불리던 고려의 잔존세력들과 세를 결합한다는 것은 곧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조정은 강력한 단속과 함께 통제권으로 흡수하는 양면 정책을 편다. 칼을 다루던 이들은 도살업에 종사하게 하고 춤과 노래에 능한 자들은 재인으로 갑옷 등 무기를 만들던 자들은 갖바치와 같은 제조업으로 흡수해 제도권화 되었으며 점차 호적에도 기록되지 않는 신백정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최하층민이 되어간다.

이들에 대한 조선조정의 과민반응은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여실히 드러나는데 이들의 실태를 정기적으로 조사해 한양과 각 지방에 분산 배치하여 그들의 명부를 작성하고 생활을 엄격히 감독케 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그 수가 7,538호, 33,712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긴장할 만한 세력이었다.

그러나 조선정부의 강력한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절과 승려는 계속 늘어났다. 이는 봉건 지배계급의 가혹한 수탈로 파산한 민중이나 도적들, 부역 기피자등이 절(寺)로 들어온 것이었다. 이는 불교 억압정책에 불만을 품은 승려들과 착취당한 민중들이 이해관계를 같이 하여 결합하기 시작한 것이었으며 불교의 적극적인 반항이었다.

후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고통을 구제할 미륵의 환생을 믿는 미륵불교가 크게 성하면서 정여립의 난, 이몽학의 난, 임꺽정의 난, 홍경래의 난 등으로 흐름이 이어졌다.

이에 대해 지배층에서는 미풍양속을 퍼뜨리고 미신을 타파한다는 명분으로 향약을 실시하여 유교 지배이념을 지방까지 퍼뜨려 민중의 오랜 신앙이었던 불교를 타파하고자 하였다. 특히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백성들의 불교공동체 생활조직인 향도(香徒)나 계를 뿌리 뽑기 위해 공을 들였다. 조선 초에는 향도를 중심으로 역을 징발하였으나 16세기 이후 점차 향약의 하부조직으로 편입시키다가 점차 두레의 형식으로 바뀌어 역사에서 완전 소멸하게 된다.

숭유억불정책으로 국가에서 지급되던 사찰운영 지원금이 끊기고 모든 자산을 동결당한 조선불교는 생존을 위한 자구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여기에서 사당패가 출연한다.

경작할 토지가 없었던 사찰의 노비출신이나 불자들로 조직된 거사사당패는 염불을 하고 다니며 자발적인 모금(시주)운동을 펼쳤는데 이에 대해 조선정부가 사찰수색령을 통해 적극적인 단속에 나선다. 이들은 이를 피하기 위해 승복을 벗고 민간복속으로 백성들의 언어로 만들어 진 새로운 형태의 염불을 만들어 내게 된다.

초입에는 염불을 부르고 나중에는 양반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기반으로 한 세속적인 가락과 춤으로 흥을 돋우는 방식이었지만 점차 염불은 가사 속으로 스며들었고 점차 농요의 형식으로 바뀌어 간다. 이는 남부지방의 선소리인 ‘보렴’, ‘화초사거리’ 등의 노랫말이 거사사당패들이 부르던 염불의 특성과 유사하다는 것으로 알 수 있으며 완도와 진도 등 남도의 도서연안지역에서 구전되고 있는 품바타령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걸립패도 출발은 역시 종교집단이었다. 수행에 전념하는 이판승과 역할을 나누었던 사판승들은 서당걸립패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시주를 독려하며 고사염불기원을 했는데 이는 고사소리를 하는 판소리 광대들을 비나리꾼으로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런 가락들은 이창배류의 회심곡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현대의 사물놀이패의 ‘비나리’는 걸립패의 ‘뒷염불’ 중 평염불, 덕담, 반맥이, 오조염불 등에서 출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적으로 오늘날 사물놀이의 체계를 세원 김덕수 또한 사당패 출신이었다. 백련사와 원각사, 청룡사 등이 사당패들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사당패에서는 남자를 거사(居士) 또는 사장(社長), 여자를 회사(回士) 또는 여사당(女社黨)이라 부르며 모갑(某甲)이라는 통솔자를 두었는데, 후일 저자에서 구걸하던 각설이패의 왕초를 모갑이라 부르는 것을 통해 품바의 원형이 사당패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각설이(覺說理)는 ‘깨달음을 전하는 말’이라는 불교용어이며 동냥도 ‘승려들의 탁발행위’를 일컫는 말인데 유학자들은 이를 거지들의 구걸행위로 낮추어 부르게 되는 것이다.

▲각설이(覺說理)‘깨달음을 전하는 말’불교용어

동냥‘승려들의 탁발행위’…호남 최초의 시포 일로장

성종실록에 따르면 ‘성종1년(1470) 전라도 백성들이 시포를 열고 장문이라고 불렀다’는 기록과 ‘신숙주(1473년)가 화폐의 유통에 대해 논의하면서 반드시 시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만들어진 최초의 시포가 남창장 지금의 일로장이다.

중종 4년(1509년)에 대사헌 권홍이 조강자리에서 한말 중에 ‘전에 고태필이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을 흉년으로 인하여 (장문을) 설립하여 진휼책으로 삼았습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1516년(중종12년) 충청도에 장시가 허락되었고 경상도에 이어 중종 15년에는 전국의 여러 도에 모두 장시를 설치했으며 숙종 때에 이르러 전국의 산간으로까지 확대된다.

그 당시 남창장으로 불리던 일로장은 영산강 내륙과 도서지역의 물류가 만나는 중요한 접점으로 배들이 남창천을 통해 일로로 들어와 장시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눌재 양성지가 성종에게 ‘저자에서의 작악개걸자에 대한 단속’을 상소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장시의 출연은 조선조정에 새로운 고민을 안겨 주었다.

무역과 상업을 독려하던 고려와 달리 조선은 성리학적 농업을 최대의 가치로 삼고 향약과 두레의 형식을 통해 백성들에 대한 장악력을 확보한다. 이는 백성들과 불교의 비밀결사조직 ‘작악개걸자’과의 소통과 교류의 창구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화척 혹은 양수척으로 불리던 고려의 잔존세력들과 연합을 모색하다 세종이 이들을 백정으로 편입시키면서 세력기반을 상실한 이들은 시장의 출연으로 또다시 백성들과의 소통과 교류의 장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전고에서 언급했듯이 무안군 몽탄면에는 쥐꼬리명당인데다 장성 이남의 출가승들의 도승지(度僧地)로 수많은 도승(道僧)을 배출했던 총지사가 있었다. 총지사는 사대부들에게는 최대의 눈엣가시 이었을 것이다.

순조10년(1810년) 충청도 석성현감 임면수는 사찰의 담을 허물고 조상의 묘지를 조성한다. 승려들은 반발했고 그 묘지에 참나무 말뚝을 박아 버린다. 임면수는 이를 빌미로 사찰에 불을 지르고 수많은 승려들이 대웅전에서 염불을 하며 분신하거나 이웃의 법천사로 피신하면서 폐찰 되게 된다.

이는 흥선대원군이 가야산의 이대천자(二代天子) 명당에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쓰기위해 충청감사를 통해 승려를 매수하고 가야사에 불을 질러 폐사 시켰다는 이야기와 흡사하다.

몽탄 총지사 폐찰…승려들 걸인으로
▲일로품바의 역사는 541년이다.

▲일로품바의 역사는 541년이다.

 몽탄 총지사 폐찰…승려들 걸인으로

이렇듯 조선조에 집요하게 추진된 숭유억불정책이 무안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품바인 작악개걸자들이 최초의 시장인 일로장에서 춤과 노래, 사설로 조선조정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불교의 교리를 설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동안 일로품바의 뿌리로 인식되어 오던 모갑이(왕초) 천장근씨(?~1973년)와 김시라씨(1945~2001)에 대한 지금까지의 관점은 조정되어야 한다. 그들은 뿌리가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품바인 일로장 작악개걸자들의 계보를 잇고 현대적으로 정리한 중시조가 맞다.

따라서 품바의 역사는 1400년이며 일로품바의 역사는 541년으로 다시 기록되어야 한다.

또한 품바에 대한 우리들의 일반적 관점도 수정되어야 한다. 시장에서 구걸하는 걸인의 무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는 불교의 비밀결사체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축제에서 엿을 팔거나 저질 음담패설만 늘어놓는 집단이 아니라 민초들의 애환과 설음을 대변했던 ‘거리의 철학자’, ‘저자의 음유시인’으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호에는 마지막으로 ‘일로품바의 활성화와 자원화 전략’이라는 주제로 원고를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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