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품바의 뿌리를 찾아서<김대호/성화대학 겸임교수>
2. 인도 대승불교의 무안군 승달산으로의 전래과정

 

지난 2월19일 무안군 청계면 도대리 일로품바전수관에서는 ‘일로품바 활성화와 자원화에 대한 워크숍’이라는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성화대학 김대호 겸임교수의 사회로 이윤선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교수의 ‘품바와 무안, 장소화 전략’이라는 기조발제를, 정유철 전남일보 논설위원, 박관서 다도해문화예술교육원 원장, 정삼조 남도문화디자인연구소 소장, 김승덕 품바4대 고수의 토론이 이어졌다.

이날 토론회를 통해 일로품바의 발전전략에 앞서 두 가지 과제가 무안군에 주어졌다.

‘일로품바는 한국품바를 대표할 수 있는가?’와 김시라의 연극품바와 난장품바 중 어떤 형식을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주)무안신문사에서는 일로품바의 글로벌 관광자원화를 위해 반듯이 해결해야 할 ‘품바의 대표성과 장소성’ 문제와 ‘일로품바의 자원화 전략’에 대해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이에 따라 김대호 성화대학 겸임교수의 일로품바의 역사적 고찰과 자원화를 주제로 원고를 4회에 걸쳐 게재한다.<편집자주>

 

무안현 남쪽 30리에 진산(鎭山)으로 세상에 전해졌다. 원 시대 임천사(臨川寺) 원명(圓明)스님이 바다건너서 왔다. 이 산을 택하여 풀을 엮어서 암자를 만들었고, 그 임천사(臨川寺)에 있는 제자들은 오백 명이 되는데, 원명을 찾아 이 산에 이르러, 모두 달도(達道)하였다. 이로 인하여 승달산(僧達山)이라고 한다.
<동국여지승람 삼십육권>

 

▲고대 영산강 일대는 독자적 세력이 지배했다.

전남 서남부 지역 해상에 대한 중앙의 지배력이 확보된 것은 조선조에 이르러서 였다. 고려 말까지 공도(도서민의 내륙으로의 강제 이주)로 해상세력에 대한 국가적 탄압이 이르러 졌고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법제화돼 명의 해금정책을 차용한 공도화정책이 시행됐다. 이것은 중앙권력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한 독자적 해상세력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무안반도의 역사는 구석기 신석기시대를 거쳐 고대국가까지 이어지는데 간척으로 소실됐지만 일로읍과 몽탄면, 청계면 등 무안반도와 영산강 일대는 한반도의 2/3를 차지하는 거석(고인돌)문화가 존재했다.

진서(晋書), 장화열전(張華列傳) 등에 따르면 3세기 무안군 등 전남서남부지역은 거대한 옹관고분을 사용하는 마한의 20여 왕국의 연맹왕국인 신미제국(新彌諸國)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장고분(長鼓墳)이 일본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과 흡사한 것으로 보아 고대 일본의 문명 발생관 연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한을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복속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재로는 근초고왕에 이르러서야 전남서남부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무안과 영산강 일대는 출발부터 내륙세력과 구별되는 독자적 세력에 의해 지배되었고 그 중심에 승달산이 있었다.

▲승달산은 신라 대승불교의 시배지(始培地)이었다.

새로운 사상이나 종교, 정치세력 등의 출발점에는 3가지 기본조건이 필요하다. 자급 가능한 너른 토지와 백성, 그리고 군사적으로 활용 가능한 요충지의 확보다.

그런 측면에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된 영암 상대포(당포)의 월출산은 골이 깊지 않고 암반이 많아 노출이 심해 성곽을 축조하고 방어를 하기에 충분치 않은 지형이다.

그에 반해 승달산은 해발 318.9m로 산이 높지 않으나 4계절 물이 흐르고 지형이 제갈량이 육손이를 격퇴할 때 썼던 팔괘진(八卦陣)과 흡사한 지형을 갖추고 있어 지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팔괘진법(八卦陣法)은 전군을 8개 단위 병력으로 나누어 사용하는데 진(進)과 퇴(退)가 따로 둘이 아니어서 변화가 무궁무진하다. 전면을 치면 후미가 돕고 중간을 끊으면 앞뒤가 협공하기 때문에 1천 병력으로도 10만 대군을 상대할 수 있는 기묘한 진법인데 승달산의 지형지세가 그러하다.

청계면 월선리의 운중수월(雲中囚月) 지형처럼 입구가 좁아 멀리서는 목적지가 분명히 보이나 안으로 들어가면 너른 벌이 나와 사방을 분간 할 수 없는 미로지형, 몽탄면 느러지는 좁은 입구와 달리 들어서면 내리의 너른 벌이 나온다. 총지사의 쥐꼬리 명당, 남악 오룡의 복잡하고 좁은 바다를 지나 나타나는 일로 감돈리 지역, 복길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도림리, 청천리, 몽탄의 파군교 등 승달산에는 여덟 곳의 쥐꼬리 지형이 10만 군사의 몫을 대신하고 있어 능히 10만 군사를 상대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성곽을 축조하지 않고도 능히 장성의 역할을 할 수 있어 수많은 풍수전문가들이 말했듯이 왕과 왕후의 기운이 있는 명산으로 꼽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8괘의 지형지세인 몽탄면 청용리 파군교 지역을 이용한 군사작전으로 김유신장군은 백제군을 격퇴하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으며 왕건 또한 견훤군을 격퇴하고 후삼국을 통일 할 수 있었다.

무안으로 작로(作路)하니/산진수회(山盡水回) 하는곳에/다소명혈(多少名穴) 없을소냐/...../사십삼절(四十三節) 건해맥(乾亥脈)에/승달산이 특립하니/금수병장(錦繡屛帳) 둘렀는데/우리스승 계시도다./당국이 평순하고/규모가 광대하니/제좌기상(帝坐氣像) 높았는데/산수회동 하였구나/천장지비(天藏地秘) 하온혈을/제마다 구경하리/...../ 성령(聖靈)은 여덟이요/ 장상은 대대로다./이후자손 천억이라/만세만세 장구하리/이 산로(山路) 헤아리니/구십팔대 향화(香火)하니/주인 나서 찾거드면/일야간(一夜間)의 영장처(永藏處)라...."
<도선국사는 옥룡자유산록에서>

이 외에도 격암 남사고의 격암유록에는 승달산(僧達山)은 ‘호승예불형(胡僧禮佛形, 노승이 부처님에게 예를 표하는 형)’ 명당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민족종교를 표방하는 몇몇 종교의 경전에서도 ‘후천오만년의 대운(大運)’이 열리는 성지로 기록되고 있다.

2대 제왕의 기운을 가지고 있어 부친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찰 된 가야사의 운명과 같이 승달산의 총지사 또한 후천오만년의 대운이 열리는 쥐꼬리 명당에 자리 잡았던 이유로 폐찰의 수난을 당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풍수’를 쓴 일본이 무라야마지쥰은 승달산 호승예불형 명당을 파헤치고 쇠말뚝을 박아 사람들이 명당을 찾지 못하게 했다는 설도 있다.

영암 구림의 사생아 도선은 풍수지리를 통해 왕건에게 체계적인 군사학 강의를 하였고 제자는 골품제도를 붙들고 있던 천녀왕국을 무너뜨린다. 이처럼 지관들의 풍수지리에는 정치세력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정치적 함수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백성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예언자적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역으로 지배층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활용되기도 했다.

신라에는 6두품 출신의 유학파들이 있었다. 이들이 정치세력화 하기 위해서는 우호적인 세력을 모아 교두보를 확보하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 해 본다면 막강한 정치군사력과 행정망을 가지고 있고 상위계급과 기득권층이 세를 확보하고 있는 서라벌에서의 새로운 사상에 대한 실험은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앙정부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운데다 적절한 소외의식과 긴장관계까지 유지하고 있고 중국, 왜 등과 오랜 교역을 통해 외부 침투에 비해 개방적인 정서를 가진 승달산 등 연안지역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불교의 기운이 쇠한 조국을 떠난 인도의 밀교승들과 당나라 유학을 통해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받아들인 혜공대사와 혜통대사와 같은 유학파들은 무안에서 새로운 이상향의 실험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기(寺記)에 따르면 법천사는 552년(백제 성왕30년) 덕예(德隸)스님이 창건했다고 하지만 총지사와 함께 신라 성덕왕 때인 725년 인도 간다라국의 정명(淨明)스님이 세웠다는 설도 있다. 혹은 신라 대승불교의 시조인 혜통스님 창건설도 등장한다.

무안현 남쪽 30리에 진산(鎭山)으로 세상에 전해졌다. 원 시대 임천사(臨川寺) 원명(圓明)스님이 바다건너서 왔다. 이 산을 택하여 풀을 엮어서 암자를 만들었고, 그 임천사(臨川寺)에 있는 제자들은 오백 명이 되는데, 원명을 찾아 이 산에 이르러, 모두 달도(達道)하였다. 이로 인하여 승달산(僧達山)이라고 한다.
<동국여지승람 삼십육권>


세 사찰의 창건설화에 모두 인도 스님들이 등장한다. 725년은 인도의 밀교승들이 대거 당나라로 이주해 포교활동을 벌이던 시기이며 대승불교의 한 일파인 라마불교를 국교로 삼은 원나라의 인도스님 원명의 전설로 보아 승달산 일대의 불교는 밀교적 색체가 강한 대승불교가 새로운 이상향을 준비하는 교두보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승불교, 신라의 골품제도를 흔들다.

당시 신라불교는 왕족은 물론 명문귀족들이 출가를 독점하고 있었다. 호족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목적으로 활용되어 백성들과는 괴리가 있었다. 전륜성왕론(轉輪聖王論)의 관점으로 왕권이 곧 불권(佛權)이었고, 군사적 입장에서는 ‘불살생’의 계율을 ‘살생유택’으로 재해석하고 전장에서 사상적 선봉에 서거나 적국에 대한 첩보활동까지 서슴지 않았다. 진평왕 때 원광법사(圓光法師)는 화랑에게 일러 준 ‘세속오계’가 대표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

7세기에 이르러 불교계에 6두품 출신들의 진출이 시작된다. 신분제도에 대한 불만과 이로 인해 새로운 이상향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이들은 당나라에 유학해 선진사상과 밀교를 공부하고 신라의 정치체제와 불교에 변화를 도모하게 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혜공대사는 천진공(天鎭公) 집에서 품팔이를 하는 노구의 아들’이었으며 같이 유학했던 명랑대사는 비교적 낮은 벼슬인 사간의 아들이었다. 원효대사는 6두품이었고 혜통대사 또한 한미한 집안의 자식이었다. 명랑대사는 귀족출신 어머니와 서민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골품을 뛰어넘는 결혼을 통해 태어난 새로운 계층들과 6두품들이 역사에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승달산 연안에서 충분한 실험을 통해 교두보를 확보한 이들은 서라벌에 돌아가지만 기득권층의 반발은 당연한 결과이었다. 그래서 탄압기 인도밀교가 그러했듯이 비밀스러운 포교의 형태 즉 밀교적 포교방식이 사용된다. 우선 백성들의 지지를 확보해야 했다. 문자를 모르는 일반백성들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형태의 포교는 춤과 노래이었다.

대안대사는 저자에서 ‘대안가’를 혜공대사는 ‘부궤무’를, 원효대사는 ‘무애무와 무애권선가’ 등으로 만행을 하며 백성들의 주목을 끌고 서서히 세력을 확대해 간다.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이 어려운 한자 대신 일반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이두문자 개발에 나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마침내 이들의 노력이 성과를 거둬 원성왕 4년(788년) 골품제도를 기초로 한 벌족(閥族) 위주의 인재 등용에도 일부 변화가 일어나 학벌로 관리를 채용하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시행된다. 6두품 원효대사는 골품의 최상위에 있는 요석공주와 혼인을 하고 세 대사의 뒤를 이어 신라밀교인 진언종의 시조가 된 ‘품팔이 노구의 아들’ 혜통대사는 신문왕대에 이르러 국사에 봉해지게 된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기득권으로의 진출로가 확보되자 신라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의지는 쇠퇴해 갔고 백성들은 더 이상 그들을 저자에서 볼 수 없었다.

▲승달산은 해상세력과 내륙세력의 경계선.

 

▲ 일로읍 회산백련지에서 열린 품바 경연대회
"진성여왕 때의 아찬 양패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백제의 해적들이 진도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활 쏘는 사람 50명을 뽑아 따르게 했다. <삼국유사 기이제2>

여기서 말하는 백제는 후백제로 당시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은 능창이라는 인물이었다. 나주는 고려의 2대 왕후인 장화왕후의 아버지인 오다련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그 세력은 승달산을 접점으로 서남해안의 해상세력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무안군 청용리 파군교와 신안군 압해면의 고이도 등 승달산 인근지역은 전삼국과 후삼국의 통일 과정에서 최고의 군사적 요충지로 내륙으로의 진출과 서남해안의 제해권과 더불어 중국과 일본과의 군사적 동맹관계를 규정짓는 주요한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최고의 군사적 전진기지이자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이었으며 왕건은 이 지역의 해상권을 장악하고서야 삼국을 통일 할 수 있었다.

장보고의 청해진부터 시작해, 견훤과 능창(수달), 고려 초 반란을 일으켰던 왕망, 1232년 원나라 제독 차라대를 격퇴했던 압해도민 등 해상세력들은 중앙정부에게 늘 위협적인 존재였다.

외세에 항복해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잃은 고려정부에게 끝까지 저항하는 삼별초와 해상세력들은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고 고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공도(섬 주민을 육지로 강제 이주시키는 행위)를 시작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거제도(1271원종12), 진도(1350 충정왕2), 남해도(1351 공민왕, 압해도, 장산도, 흑산도 나머지 섬들에 대한 공도를 실시한다. 이 섬들은 하나같이 군현이 설치될 정도로 비중 있는 데도 굳이 섬을 비우려는 의도는 명확하다. 삼별초와 토착해양세력이 결합해 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한 상태인데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대몽항쟁에 나섬으로써 정통성을 상실한 고려정부는 백성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고려 말의 공도는 조선왕조 들어 일시적 ‘조치’를 넘어 공도정책으로 법제화 된다. ‘궁(宮)의 허락 없이 몰래 섬에 들어간 자는 1백대의 장형을 받는 것으로 규정되었으며 심지어 섬에 도피 은닉한 죄는 본국을 배반한 죄에 준하는 것으로 다스려져야 한다.’는 상소까지 있었다.

국제 해상무역을 주도하고 외세와의 완충역할을 하던 해상세력이 명과 조선의 해금정책으로 몰락하면서 조선은 국제무대에서 사라져 갔고 국력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일본의 해상세력은 왜구가 돼 서남해안과 중국까지 침탈해 노략질을 일삼게 된다.

이러한 밀교적 전통 외에도 조선개국과 세조의 왕의찬탈 과정에서 절의파들의 호남 이주가 이어졌고 기묘사화, 기축옥사 등이 이어지면서 전라도 사림의 중앙정계로의 진출 좌절되게 된다. 전라도가 주요 유배지가 되면서 지방 세력과 결합한 독특한 유배문화가 성립되고 성리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물 안에 갇힌 조선사회를 변화를 촉구하는 실학사상도 태동하게 된다.

이렇게 일로품바의 태생지로서 무안군과 승달산 연안이 가지는 장소성과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다음호에서는 한국 대승불교의 토착화와 몰락의 역사, 그 과정에서 어떻게 일로품바가 탄생됐었는지에 대해서 글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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