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리즈 3

호남의 여러 사찰 가운데 그 구조의 정교함이 으뜸이라 할 만큼 큰 절 총지사가 무안땅에 있었다는 사실을 무안 주민들 중에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여러 고문헌과 고지도에서 승달산 지맥에 속하는 백운산 자락에 총지사가 존재한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총지사에 관해서는 백창석 현 무안문화원장이 조사 연구한「무안 백운산 총지사에 대한 일고찰」이라는 논문에서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아마 총지사에 관하여 창건과 폐찰에 얽힌 역사적 사실과 흥미로운 전설 및 설화들, 그리고 주변의 수많은 연관사적과 사료들을 이처럼 상세하고 깊이 있게 체계적으로 잘 정리한 자료는 이 연구 논문이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백원장이 이 연구논문을 통해 밝히고 있는 총지사에 관하여 총 65쪽 분량 가운데 핵심적 요점만을 뽑아 소개하고, 우리지역의 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새겨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총지사는 몽탄면 대치리산 138번지 약 105정보에 달하는 나주임씨 소유의 임야에 위치하고 있다. 면성지등에 기록된 총지사는 725년(신라 성덕왕 24년) 무렵, 승달산 법천사가 창건된 같은 시기에 당 나라에서 건너온 정명이라는 스님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처음에 승달산 지맥에 속하는 백운산 중봉에 창건했다가 원인불명의 화재로 소실된 후, 1016년(고려 현종 7년) 을유스님이 현재의 백운산 아래터로 이건 하였으며, 그 구조의 정교함이 호남의 여러 사찰 가운데 으뜸이라고 했다. 주변에는 총지사와 연관된 사적과 전설 및 설화, 그리고 수많은 흔적들이 총지사의 실체와 사찰규모의 유추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스님들이 사용했다는 중들샘, 스님이 죽었을 때 불에 태우는 장소 소살터, 탑밭ㆍ먹굴ㆍ청룡등ㆍ등잔걸이ㆍ쇠묏등ㆍ촌전야지ㆍ불당골 중샘 등등이 주민들의 기억속에서 전해오는 설화와 흔적들이다. 사적지로는 총지사터 본당 오른쪽 절벽에 위치했다는「원통암」이 있고, 원통암의 우측 9부능선 쪽에「웃바람사」가 있으며,「낡은절」이라고 불리는 넓은 절터가 있다. 그밖에 사적지로 흑암사 , 낙근사 등이 있었다. 사찰터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전라남도 지방민속자료 제23호로 지정된 석장승 두기가 있다. 총지사의 경계표시물로 짐작되는 이 석장승은 본래 영산강 쪽으로 500m 정도 더 내려간 봉암마을 입구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총지사 터가 예상보다 훨씬 넓은 영역이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가늠케 한다.역사적 사실을 입증해주는 기록물로는 7개의 고문헌과 여러 개의 고지도가 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하여 여지도서ㆍ대동지지ㆍ조선환여승람ㆍ면성지ㆍ무안현읍지ㆍ무안군지등의 고문헌에 총지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해동지도ㆍ대동여지도ㆍ광여도 등의 고지도에도 총지사의 위치가 분명히 표시되어 있다.

총지사가 있었다는 기록이외에도 신증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승달산(僧達山)의 유래에 대하여「원나라 임천사 승려 원명이 바다를 건너와서 풀을 엮어 암자를 짓고 수행했으며, 이어서 제자 500명이 이 산(본래 영축산)에 와서 수행을 통해 모두 득도했다」고 하여 승달산(僧達山)이라는 산 이름이 붙여졌다는 유래를 밝히고 있다.

노천연보에는 동사회강의 지은이 임상덕이 어렸을 때 총지사에서 공부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총지사의 폐찰에 관해서는 불에 타 소실된 것으로 전해오는 두 개의 전설이 있다. 하나는 지역유림에 속하는 세도가와 승려들간에 명당 묘자리를 놓고 갈등을 빚다가 1810년경 세도가에 의한 방화로 소실되었다는 전설이다. 또 하나는 처녀총각의 사랑에 얽힌 전설이 있는데, 내용을 생략하겠다. 또 다른 측면에서 조선의 억불승유정책과 조선후기의 삼정문란으로 국가기강이 문란한 틈을 타 평소불교에 대하여 반감을 가졌던 지역유림들이 사찰을 불태웠지 않았나 하는 견해도 있다.

예로부터 승달산에는 남도최고의 명당이 숨겨져 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총지사가 있었던 백운산 자락에 명당이 있음을 추측케하는 대군왕지(代君王地)라는 표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현재 무안에는 총 20개의 크고 작은 사찰들이 있다. 그 중에서 유래가 깊은 고찰로는 법천사와 목우암, 해제의 원갑사, 무안읍의 남학사(약사사)가 남아 있을 뿐이다.

주목해 볼 것은 오래된 이 지역 사찰들이 본존불로써 석가모니불을 모시지 않고, 아미타여래불ㆍ약사여래불ㆍ비로자나불 등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지역에 밀교와 깊은 관련을 갖은 화엄계통의 사찰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백원장은 견해를 밝히고 있다. 화엄사상은 곧 밀교와 연결되어 고려태조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특히 고려초에 나타났던 연등회와 팔관회는 범국가적 행사로써 백성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밀교의 경전은 다라니이고, 다라니는 작지(作持)ㆍ능지(能持)ㆍ총지(摠持) 능차(能遮)라고 음역되므로, 따라서 총지는 밀교의 가르침이요, 그 가르침을 구현하는 곳이 총지사라고 연결지어 해석할 수 있다.

여러 자료에서 보듯이 총지사는 총지마을ㆍ낙근사ㆍ웃바람사ㆍ원통암ㆍ낡은절 등을 접하고, 팔만구암자의 규모를 자랑하는 큰 절이었던 것을 충분히 짐작 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사상적 주류를 이루었던 밀교 경전에서 총지사라는 사찰명을 따온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백운산은 대찰이 있을법한 큰 산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사찰이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은 영산강이라는 해상교류의 관문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무안군은 대륙의 발전된 문화가 해로를 통해 전래 되어온 하나의 주요 관문지역이었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총지사가 원형대로 복원될 수만 있다면 문화유산으로써 그 가치가 얼마나 될까? 생각만해도 가슴뛰는 일이다. 총지사의 복원작업은 문헌조사 및 지표조사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실체의 규명이 전제되어야 한다.

지표조사 단계에서부터 발굴ㆍ복원에 이르는 과정에서 넘어야 할 장벽이 높고,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일이다.

무안군이 최소한의 재정부담만으로 국고보조를 받아 이 역사적 과업을 완수하려고 한다면 그 묘안이 무엇일까?… 다음주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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