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당시 무안은 동학군의 소굴로 활동은 대단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무안지역의 동학은 역사속에 묻혀져 왔고, 최근 몇몇 학자들과 동학군 후손들이 제기하면서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지난해 동학군 명예회복에 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 정부가 시군 자치단체를 통해 접수를 하면서 이들 후손에 대한 유공자 논의도 일고 있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평등사상, 척왜양의 민족주의, 개벽사상을 근간으로 창도, 사회 밑바닥의 민중 위주로 포교되어 1894년 12월 동학군을 이끌었던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동학 장수들이 잡혀 막을 내리기까지 근대사의 한획을 그었던 농민혁명이었다.

이때 무안지역에도 동학장수 배상옥(규인)이 있었고, 그는 전봉준과 버금가는 인물로 군사만도 손화중포를 능가했으며, 전봉준과 더불어 1천냥의 수배가 내릴 만큼 거물 장수였다.

또한 동학장수로는 전봉준의 새야새야 파랑새야 노래와 더불어 배 장군에 대한 민요가 전래되고 있을 만큼 그는 지역의 대접주로써 해제면 임수리와 삼향면 대월촌(지금의 목포시 대양동)에 동학군의 훈련장을 두고 활동도 했다.

하지만 현재 무안지역에는 동학과 관련해 해제 석용리에 최장현 3형제가 동학에 입도, 나주성 싸움에서 일본군에 생포돼 혀를 깨물고 자결한 뜻을 기린 삼의사비가 있을 뿐 배 장군의 출생지와 집강소는 푯말 조차 없고, 선친의 묘소는 소나무가 자라 혁명군 후손의 초라한 모습을 알려 주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행정의 관심이 필요하다. 이를위해 먼저 기초 학술조사를 실시,지역의 나이 드신분들이 작고 하기전에 구전으로나마 내려 온 동학자료를 채록할 필요가 있다.

물론 지자체의 재정형편으로 관심을 쏟기에는 역부족일지도 모르나 선친들의 역사를 발굴하고, 이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현대인들의 과업이다.

무엇보다 미래는 무형의 자산이 유형의 관광자원이라는 것을 명심한다면 적극적인 관심으로 무안의 동학이 고부와 장흥보다 더 큰 역사적 활동 무대였음을 조명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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