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신문]

발행인 박금남
발행인 박금남

아이는 울어야 젖을 준다고 했다. 가만히 있으면 배부른 줄 안다.

하지만 울어도 젖을 주지 않으면 참고 체념하며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들에 대해 사회는 바보 취급한다. 때문에 참고 견디다 공정성이 임계점에 이르면 저마다, 그리고 목적이 같은 사람들끼리 뭉쳐 목소리를 높여 세상은 시끄럽다. 기득권 역시 목소리를 내야 귀를 열고 땜방 처방을 해주고 있는 것도 목소리를 키우게 한다.

자지체 행정도 다르지 않다. 공직자의 권력은 일반 서민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권력이다. 그들 역시 내심 권력자라고 생각하기에 지방자치제 실시 후 지방권력은 끼리끼리 나누는 권력이 됐다. 친하면 챙겨 주고, 목소리 높으면 끼워 주고, 형평성을 운운하면 찔끔 나눠 준다. 가만히 있으면 모른 체 하면 된다. 이게 지자체 행정의 특성이다. 명분은 윗사람을 위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이익이나 편리함이 숨겨져 있다. 때문에 국민의 세금을 나누면서 권세를 부리다 공직생활 퇴직 후 지역에 터를 박고 살아가는 공직자는 많지 않는 현실이다.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고 하듯이 시세말로 조사하면 다 나오는 세상 아닌가.

요즘 우리사회 소통을 지배하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봐도 목청 큰 몇 사람이 담론을 지배하는 구조다. 사회가 시끄럽다는 것은 그만큼 안정감이 없고, 불신이 깊어져 있어 분명 문명사회는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목소리가 큰 것은 자기 과시에서 비롯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명품으로 치장하고, 더 좋은 차, 더 넓은 아파트로 등으로 물적 과시를 통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넘쳐나 우리사회의 고질병이 된지는 오래다. 이는 자아가 공허할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남보다 앞서야 하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욕구 스트레스에서 빚어진다고 한다.

사회적 성공도 마찬가지다. 과도한 신분 상승 욕구 때문에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아첨을 일삼는다. 이들은 직위를 이용해 얻은 정보를 가지고 자기 성공을 위해 편을 가르고 결국은 자신마저 속이고 상습적 거짓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겪는 ‘리플리’(Ripley) 증후군을 앓게 된다. 리플리증후군은 사회적 성취욕은 강하나 성공 가능성이 낮을 때 점점 더 거짓말과 신분 위장을 하는 심리적 현상을 말한다.

대선을 앞두고도 요즘 우리나라 전국 방방곡곡이 시끄럽다. 그런데 당선 가능성이 높은 여야 2명의 후보 면면은 역대 최악이라고들 한다. 이들을 위해 국회의원을 비롯해 지방의원, 그리고 정당원들은 연일 자기 당 후보가 최고라며 충성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사회관계망서비스를 온통 뒤덮는 아이러니 촌극까지 벌어지고 있다. 모두 생계형에 묶여 있어 대통령 후보에 대해 ‘당신은 아니요’라고 올곧은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은 없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자기당 후보 당선을 위해 상대 후보 네거티브에 혈안만 된 목소리에는 진실과 정의가 사라져 있다.

당연지사, 이런 현상들이 켜켜이 쌓여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에게 터부 대상으로 반기를 들게 했다. 무엇이 정의이고, 공정이며, 분배인지 모르는 불평등 사회를 기성세대가 초래한 셈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기득권은 독점을 지키기 위한 목소리 뿐이다. 일례로 한번 정치의 권좌를 맛보면 그 맛에 취해 생계형이 된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도 우리 지역 정치인 누구 한명 불출마 선언은 없다. 4년 동안 못한 일을 다음 차기에 해 내겠다는 것은 지방정치 30년사를 되돌아보더라도 30년 전 공약이 지금도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점이 반증한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나만이 돼야 할수 있다는 자가당착에 빠져 목소리를 높일까. 이에 합세한 주변 부류도 어쩌다 그를 통한 권력 찌거기라도 맛보기 위해 자기주장만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면 불통자로 치부해 버리면서 정의도 진실도 없다.

따라서, 공정을 부르짖는 젊은 세대들의 목소리가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멋지게 나이 드는 법’이란 책을 쓴 미국의 여류작가 도티 빌링턴은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하면 늙었다는 증거다”라고 했다. 상대방 의견에 토를 달지 못해 좀이 쑤시기 시작하면 나이가 든 징조라는 것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시대에 안맞는 자기 경험 강요도 그렇다.

하지만 그게 어디 나이 든 사람들뿐일까 싶다.

남의 얘기 잘 들어주며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 환영받는 사회는 목소리가 높고 시끄럽지 않다. 공감을 위해서는 비판보다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적극적인 경청’이 필요하다. 공감하는 삶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고, 목소리를 낮춰 남의 눈을 의식하는 사회가 품격 있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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