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신문]

박금남(무안신문 발행인)
박금남(무안신문 발행인)

요즘 나이 어린 사람을 만나 충고하면 ‘꼰대’로 치부된다. 소크라테스, 공자, 예수, 석가모니 등 성인들도 요즘 시대에 태어났다면 모두 ‘꼰대’로 전락했지 않았을까 싶다.

국어사전에서 ‘꼰대’를 찾아보면 은어로 ‘늙은이’를 이른다. 곧 권위적인 사고를 가진 어른이나 선생님을 비하하는 학생들의 은어였다. 최근에는 꼰대질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다시 국어사전을 빌리면 ‘현재 사회를 이끌어 가는 나이가 든 기성세대’ 모두는 도매금으로 ‘꼰대’가 돼 있다. 

‘꼰대’를 풍자하는 말로 ‘라떼는 말이야’가 많이 회자된다. 젊은 세대의 촌철살인(寸鐵殺人) 돌직구다.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젊은 사람에게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연장자나 직장 상사를 비하하는 말이다.

실제로 20-30대 공무원 10명 중 9명은 ‘우리 회사에 꼰대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가장 흔한 꼰대 유형으로는 과거 경험만 중시하고 세대별 차이를 무시하는 ‘라떼는 말이야형’과 상명하복을 강요하는 ‘군대조교형’, 본업과 무관한 개인적 심부름을 시키는 ‘갑질오너형’ 등이 꼽힌다. 

꼰대질은 보통 말하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 사이 경험의 차이에서 생겨난다. 

젊은이들이 일컫는 꼰대세대는 호롱불, 재래식 변소, 우물, 가마솥, 손빨래, 보행·자전거, 검정고무신·까까중·보자기·고무줄·주판 세대였다. 또한, 공돌이·공순이 세대로 일제고사·입학시험 등을 치르며 성적에 등수가 매겨졌던 세대였다. 

이들 꼰대세대의 생활은 급격하게 변하는 디지털 시대에 태어나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는 전설의 고향 이야기에 불과하다. 

문제는 꼰대들이 현재 유효하지 않은 경험의 틀에 갇혀 자신이 과거에 쌓았던 경험이 무조건 옳다고 믿으며 바꾸려 하지 않는 태도다. 자신이 옳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당연한 듯 자신의 경험과 자기방식을 강요한다. 

꼰대의 또 다른 특징은 남의 장점보다 단점을 보려 한다. 자신과 비교해 타인의 단점을 지적하고 훈계한다. 완벽한 사람은 없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광속으로 변화한다. 과거 경험은 자산으로서의 가치가 낮아졌고 변화된 환경 속에서 새로운 도전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물론 모든 과거의 경험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현재와 미래를 담보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편으론 젊은 사람들이 자기 방어의 목적으로 꼰대라는 말을 무기처럼 장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무슨 말이든 자기보다 나이 많은(직급 높은) 사람이 조언하는 경우 들어보지도 않고 귀를 닫아버린다. 꼰대라고 아예 대화상대로 쳐주질 않는다. 

각설하고 ‘라떼’는 동네 어른들이 젊은이와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에 혼을 내는 경우가 꽤 있었다. 물론 그 말을 온전히 듣고 새사람이 되지는 않았지만, 지역 공동체 안에서 어떤 분위기를 잡아줬다. 과거에는 변화의 속도가 느렸고, 경험은 중요한 자산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때문에 어른이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은 아닐 것이다.  

안 그래도 삭막한 세상이다. 젊은 세대들도 자꾸 귀를 닫다가는 언젠가 식겁할 수도 있다. 알고 보면 많은 불행한 일들이 일방적인 데서 나왔다. 살아온 시간의 길이만큼 삶의 연륜에서 나오는 지혜는 생의 길이와 비례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곧 디지털 시대의 지식으로 아날로그 지혜를 살수 없다는 것이다.

핵심은 꼰대도 젊은 세대도 모두 ‘일방적’에 있다는 점이다. 

꼰대들은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가난하고 엄한 부모 밑에서 자라나와 열심히 캥거루 세대를 키워낸 죄밖에 없는 데 지금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 낀 샌드위치 세대가 됐다. 경우에 따라 과거의 경험이 현재에 유효할 수도 있다. 땀과 희생으로 일궈낸 꼰대들의 ‘라떼는 말이야’가 식상함과 무조건적 거부감으로 외면되어 가는 현실이 기우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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