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2월, 72년만에 무안군청 목포에서 환군 올해로 반백년
초대 군수는 개척자 였다…새 무안창조 ‘무에서 유 창조’

지게 없애고 리어카 시대 열어…군 단위 최초 공무원 연금주택 50동 건립
무안군 청사부지 선정 및 군단위 전국 최초 종합청사 건립
‘농로 천리길 뚫기 운동’… 1971년 시작된 새마을운동 효시

정시채(85) 에덴원 이사장은 진도에서 태어나 목포고, 전남대 법과대학 졸업 후 행정고시에 합격. 광주경찰서장, 무안군수(초대), 광주시장, 전남도 부지사, 국회의원(제11·12·14대), 농림부장관, 초당대학교 총장 역임 등 입지전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27살에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50여 성상의 공적을 신문 한 페이지에 열거한다는 자체가 무리다. 농촌문제부터 남북문제까지 우리 현대사 곳곳에 그의 족적이 남지 않은 곳이 없다.
본지는 정 이사장의 공적을 각설하고 오는 2월17일 무안군수 취임 50년을 맞는 초대 무안군수로 재직(1969년 2월17일∼1970년 3월5일) 동안 무안군에 남긴 업적 중심으로 인터뷰 했다.
대담은 지난 8일 에덴원 이사장실에서 이뤄졌다. 초대 무안군수 인연으로 2002년 청계면에 사회복지법인 에덴노인요양원을 건립해 현재 이사장을 맡고 있다.     (편집자주)

학력
△ 진도 출생
△ 목포고등학교 졸업
△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 전남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석사·박사

경력
△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
△ 광주경찰서장
△ 무안군수
△ 광주시장
△ 전라남도 부지사
△ 제11·12·14대 국회의원
△ 국회 농림수산위원회 위원장
△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위원장
△ 남북 국회회담대표
△ 농림부 장관
△ 초당대학교 총장
△ 사회복지법인 에덴노인요양원 이사장

■ 초대 무안군수 부임

무안군청은 1897년 목포항이 개항되면서 목포부로 이전했다. 그후 1969년 무안군과 신안군이 분군(分郡)되면서 무안군 청사를 신안군에 주고 군청간판만 가지고 무안면 소재지로 72년 만에 환군했다.

분군된 초대 무안군수 모집에 33살의 정시채 전 광주경찰서장이 응모하여 발령받아 1969년 2월17일 무안에 도착했다.

정 이사장은 “당시 무안군은 새로 생겨 고생이 많으니 화순군수로 가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초대 무안군수 취임이 의미가 있겠다 싶어 선택했다”고 회고했다.

군청사가 없어 무안면사무소를 군청으로 사용했고 무안면사무소는 무안초등학교 교실을 빌려 썼다. 군수실은 7평 되는 면장실을 사용했고, 내무과와 재무과는 면사무소 건물을 농산과·식산과·산림과·건설과는 성동리 소재 재일교포 개인 창고를 사용했다.

취임식도 허허벌판에서 이뤄졌고, 분군 후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군청사 신축이었다.

■ 개척자 였다

먼저 직원들의 생활 안정이 필요했다. 120여명의 직원 대부분이 목포에서 출퇴근 하다보니 야근 등으로 어려움이 컸다. 따라서 직원들의 주거문제 해결이 급했다. 이를 위해 공무원 연금주택을 유치하고자 총무처에 건의했지만 도청소재지에도 연금주택을 배정 못하고 있다면서 불가능 회신이 왔다. 고민 끝에 압해정씨 종친간인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사신으로 건의했더니 총무처장관에게 지시하여 공무원 연금주택 50동을 특별히 배정받아 직원들의 주택문제를 해결했다.

또한 소재지 우물이 철분이 많아 와이셔츠를 세탁하면 빨갛게 될 만큼 식수로 부적합하여 상수도 시설이 시급했다. 물 역시 군민 건강과 직결돼 있어 내무부장관에게 건의해 특별교부세를 지원받아 상수도 시설을 했다.

군청소재지 교통문제 해결도 숙제였다. 간이역인 사창역을 본역으로 승격하고 역 이름을 무안역으로 바꾸기 위해 철도청장 자택을 방문하여 무안역 문제를 해결했다.

■ ‘무에서 유’ 를 창조

부임 후 어느 것부터 해야 할지 선후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많은 과제들이 산적했다. 설상가상 1967∼8년 전남지역 강우량은 평년의 ⅓에 불과하여 저수지는 물론 우물까지 고갈되어 식수난을 겪는 대한발 이었다. 수도작은 재배면적 53.2%가 고사하여 약 204만석이 감수되고, 밭작물도 재배면적 81.4%의 피해를 입어 108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특히, 전남서부권인 일로 영화농장과 해남 화원지구 피해가 심해 1969년 무안관내 한해대책사업으로 관정 961개, 저수지 13개, 집수암거 24개동 등 1,031개를 전 군민이 총력을 쏟아 농번기 전에 준공해 냈다.

한해 대책사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1969년부터 새로운 「4점식이앙법」이 개발되어 상부로부터 4점식 모내기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러나 군민들의 거부가 심했다. 결국 전 공직자들이 설득에 나서 산비탈 한계답까지 4점식이앙으로 마치게 된 것도 보람이었다.

■ 군민헌장 선포

군정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군민들이 군정에 참여하고 협조하면서 새 무안 창조의 역사의식을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군민상(君民像)’ 정립이 필요했다. 이에 ‘신조(信條)’의 군민헌장이 필요하다고 보고 직접 초안한 군민헌장을 제정하게 됐다.

군민헌장에 담을 기본정신은 전문에서 무안군민의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고, 본문에서는 군민 모두가 협력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협동과 자립의 자세, 그리고 공중도덕과 준법정신에 입각하여 올바른 군민이 되자고 했다.

이러한 목적과 취지를 담아 성문화 하는데 약 6개월의 심사숙고 끝에 군민헌장을 확정, 1969년 9월 15일 군민헌장 선포대회를 갖고 군민 모두가 군민헌장을 숙지하고 준수해 나갈 수 있도록 헌장전문을 사진액자에 넣어 3만5천 전 가정에 나누어 주었다. 그 후 30년이 지난 1999년 5월 7일 이재현 군수께서 불무제근린공원 조성 후 이곳에 군민헌장탑을 건립했다.

■ 전국 최초의 종합청사

부임 3일째 되는 날 군청 간부 및 지역 유지들과 청사 신축문제를 논의 했다.

부지는 성남리가 좋겠다는 의견이 나와 현지를 답사했지만 군청부지로 적합하지 않았다. 평지에다가 지대가 얕고 그 위로 광목간 국도가 통과해 풍수지리로도 부적당 했다. 따라서 더 물색하기로 하고 비밀리에 무안군 소재지를 돌아다니며 살펴보았지만 적당한 부지를 찾기가 어려웠다. 차일피일 시간만 흘러가는데 어느 날 박종의(성동리 거주) 씨가 찾아와 성동리에 적지가 있다고 했다. 현지를 답사해보니 국도위에 있고 지대가 산을 배경으로 높으며, 박씨 말에 의하면 그곳에 옛날「역마사」가 있었던 곳이라면서 그쪽으로 확정한다면 성동리 주민들이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했다.

성동리로 청사부지를 결정하자 성남리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다. 일부 성남리 주민들은 군수 떠날 때까지 각처에 진정을 넣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의 위치로 확정한 것은 지금도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부지가 확정되자 청사 설계를 해야 했다. 당시 내무부 방침은 군 단위 기관을 한 단지에 입주시켜 모든 민원 업무를 유기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종합청사를 건축하라는 지시였다. 따라서 5천평의 부지를 매입하여 3천평은 군청, 보건소, 농촌지도소를 신축하고 나머지 2천평은 교육청과 농협부지로 했다.

그런데 교육청과 군농협이 부지를 별도 마련하여 독자 신축하겠다고 반대했다. 도교육감은 교육청이 한 건물에 위치한다는 것은 기관의 사기 문제가 있다고 반대했고, 군 농협장은 금융기관은 예금자의 편의 도모를 위해 소재지 중심가에 위치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이 문제는 군수의 능력을 평가받은 첫 시험대가 됐다.

도교육감에게 종합청사 건립에 대한 내무부의 입장을 설명하고 수차 방문해 설득하여 동의를 얻어냈고, 군농협 역시 출입문을 별도 개설해 달라는 조건부 합의를 이끌어 군청·보건소·지도소는 군청예산으로, 교육청과 농협은 별도 발주했다.

군청 청사는 현대적 건물로 건축하기위해 지방보다 서울에 있는 설계사무소에 용역을 맡겨 입찰를 거쳐 1969년 4월 18일 기공했다. 건물 정초에는 ‘군민의 뜻을 모아 이 집을 세운다, 무안군수 정시채’ 휘호를 새겨 붙였고 동년 12월 5일 준공 입주했다.

건축규모는 3층 건물에 연건평 800평(2,475㎡), 사업비는 6천6백만원이 소요됐다.

■ 농로 천리 뚫기 운동

군수 부임 후 군민들의 현장 의견 수렴은 ‘지게’를 지지 않고 좀 더 편하게 영농을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요구였다. 앞으로 농촌근대화를 이루려면 ‘지게’를 없애야 한다는 군민들의 의견에 공감이 갔다.

그러나 지게를 없애려면 농촌실정에 맞는 다른 수송수단이 필요했다. ‘리어카’였다.

리어카는 논두렁, 밭두렁 길로는 다닐 수 없고 농로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농로를 개설하지 않고 지게를 없앤다는 것은 헛구호에 불과했다.

그래서 농로 뚫기 사업을 추진하기로 하고 면장들에게 해당 면내에 필요한 사업물량을 파악해 보고하도록 했다. 8개 면 전체 사업량이 약 395㎞로 거의 천리가 됐다. 따라서 사업명을「농로 천리 뚫기 운동」으로 정하고 전남도에 보고하자 “예산도 없이 가능하겠느냐”면서 부정적 견해를 보였다.

자력으로 해 내겠다는 강한 의지로 1970년도 시무식은 전 직원이 작업복차림으로 농로 공사현장에서 가졌다. 직원들에게 100m 줄자 하나씩 나누어 주고 금년도 군정 목표인 농로 천리 뚫기 운동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나가자고 당부했다.

농로사업은 첫째, 농로부지는 모두 토지소유자에게 희사받고, 둘째, 국도비 지원 없이 자력으로 하며, 셋째, 농로는 그 마을 책임자가 관리하도록 3대 추진방안을 정했다.

그러나 추진과정에서 농로부지 희사에 어려움이 닥쳤고, 결국 ‘새 무안 창조’ 정신으로 토지소유주들을 설득시켜 농로 부지를 한 필지도 매입하지 않고 희사 받아 계획대로 추진했다.

사업이 마무리가 되자 농로관리가 문제가 됐다. 예산상 지적정리는 어려워 농로마다 자연석으로 표석을 세우고 도로관리자·노선길이·노폭 등을 기재해 철저하게 관리하도록 했다. 특히, 농로천리뚫기운동은 그후 정부가 1971년부터 시작한 새마을 운동의 효시가 되어 무안군이 선도적 역할을 했다.

■ 행정의 답은 현장에 있다

“저는 짧은 임기 동안 농촌근대화 사업, 한해극복 사업, 행정기반조성 사업 등 3대 사업을 모두 완수해 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짧은 기간에 그 많은 일을 해냈다는 것에 놀란다”는 정 이사장은 “답은 현장에 있다는 생각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 듣고 깨닫는 것을 아이디어로 창안 실천하는 개척자 정신으로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행정의 힘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회고 했다.

또한, “관내 현안사업 파악 차 아침 식전부터 군수전용 짚차를 타고 면내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아침식사는 마을이장이나 유지댁에서 먹었다. 한번은 현경면의 어느 마을을 방문했는데 마을이 생긴 후 ‘원님이 우리 동네에 처음 오셨다’면서 마루에 자리를 깔아주며 할머니들이 군수 구경 와서 손을 어루만져 주어 시골할머니들의 순박함과 군수라는 관직에 대해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고 말했다.

한편, 정 이사장은 무안군수 13개월 재직 동안 최우수군 표창 5개 수상 등으로 전국 시장 군수 중 한명을 뽑아 독일로 연수 보내는 군수로 뽑여 교육받던 중 두 계급 진급한 광주시장으로 발령받아 1년1개월의 무안군수 임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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