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문화원장 백창석

[무안신문] ▲ 반월산 아래에 자리잡은 안고랑의 마을-몽탄면 대치1리 한재

한재는 대치1리에 속하는 마을로 이천서씨 집성촌이다. 예전에는 지금과 같이 무안으로 가는 큰 길이 나기 전 일로나 몽탄 그리고 나주 동강에서 무안읍을 가려면 마을 뒤의 큰 재를 넘어야 했는데 큰 재에 해당되는 마을이라 해서 한재[大峙]라 했다.

이 마을 앞으로는 대치천이 흐르고 있으며 뒤로는 승달산이 동북쪽으로 힘차게 뻗은 연징산의 맥을 이어받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뒤에는 반월산이 마치 마을을 감싸 듯 벌려있으며 풍수에서 말하는 좌청룡 우백호의 형세를 취하고 있다. 앞에는 솔대봉(봉암마을에서는 봉암이라 한다)이 지켜보고 있어 이러한 지세 때문에 ‘안고랑 마을’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나주 나씨들이었다. 현재 대치저수지 아래에 해당하는 곳으로 지금도 나씨들의 사당 터가 남아 있다. 이어서 탐진최씨가 월산사 옆 항동골이라는 곳에 정착하였으며 함평노씨도 마을 입구의 교회주변인 벚나골에 정착하였는데 세 성씨 모두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 한재마을 입구

이 마을에서는 세 곳의 분청자 도요지가 발견되었다. 대치저수지 주변의 도요지와 월산사 옆의 도요지, 그리고 마을에서 대치저수지로 가는 중간 쯤에 또 하나의 도요지가 있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가마터와 조화 덤벙 귀얄기법 등의 많은 분청자기 파편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한 마을에 많은 도요지가 발견된 것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으나 이 마을의 지리적 위치와 당시의 울창한 산림을 포함한 주변 여건 등을 감안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천서씨의 재각인 月山祠가 있다. 마을 뒷산인 반월산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 祠宇는 1752년(영조2) 이천서씨 후손들에 의해 구거지인 반월산 서쪽 기슭에 창건하여 절효공 서릉을 배향하였다. 그러나 오랜 풍우로 건물이 퇴화하자 1829년에 반월산 남쪽 기슭, 현재의 자리로 옮겨 중건하였는데 이때 사암 서식 그리고 이 마을의 입향조인 정암 서숭로를 추배했다.

월산사 아래에 통샘이 있다. 용천수로서 68년의 대 한해에도 마르지 않았던 샘으로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샘이다. 마을 입구에 500년이 되었다는 규목(槻木)나무가 있다. 괴목나무로 더 알려진 이 나무는 느티나무과로 알려졌으며 대체로 당산목으로 주민들이 신성시 여기는 나무다. 마을 입구 도로변에 김해김씨절효비가 있다. 김해김씨의 절효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18년에 건립한 것이다. 몇 년 까지 있었던 비각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비석만 세운 것이다.

▲ 벌집 모양의 바위가 있는 마을-대치2리 봉암

봉암은 대치2리에 속한 마을로 원래 봉암 청룡 총지 장동이 대치 2리였으나 2009년에 봉암과 청룡은 2리로, 총지와 장동은 3리로 분리되었다. 원래 이 마을은 고씨와 최씨들이 살았으나 현재는 한 가구도 없다. 이후 옆 마을 한재에 살던 이천서씨들이 200여년 전에 들어오면서 서씨 집성촌이 되었다.

▲ 벌봉 아래의 봉암_마을_전경

봉암이란 지명의 유래는 마을의 지형이 벌을 닮았을 뿐 아니라 마을 옆에 벌집 모양의 큰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정면에서 보면 알 수 없는데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살펴보면 벌의 형상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해서 마을 옆에 있는 바위를 벌바위[蜂巖]라 하고 마을 이름도 봉암이라 했다. 마을 뒤에 벌과 관련된 암벌바위 벌멍덕 등의 지명도 있다.

벌바위 아래에 기름바위[油巖]가 있다. 바위 사이에서 물이 나오는데 그물에 기름기가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지질학자들이 자주 와서 바위에 관련된 조사를 많이 해가기도 했다. 또한 이 바위 밑에 장승거리 샘이라 불리는 우물이 있었는데 67년 대한해 때도 물이 마르지 않아 주변 마을 사람들도 마셨던 물이다.

▲ 백운산에서 바라 본 총지마을

이 마을은 승달산 줄기인 마협봉을 주산으로 하고 마산을 앞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대치천이 흐르고 있다. 1811년 총지사가 폐찰이 되기 전까지 이 마을은 총지사 경내에 속한 마을이었다. 왜냐하면 장승거리라 불리는 곳에 총지사의 석장승이 있었는데 오래 전에 주민들이 현재의 총지 마을 앞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장승거리는 벌바위 아래를 말한다.

마을 앞 고래실골이라 부르는 농지에 고인돌 群이 있었다. 10여개가 넘게 있는 곳과 커다란 바위 1개가 있는 두 군데가 있었다. 그런데 1989년 경지정리를 하면서 일부 주민들이 보존하자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땅을 파고 묻어 버렸다. 마을 뒤에는 1990년대에 들어선 건양교회가 있다. 상당한 규모로 점차 커져가고 있는데 마을 주민들과는 교류를 하지 않고 있다. 교세가 커지면서 마을을 가르고 지나는 길에 교회 차량의 통행이 많아지면서 주민들이 불편해 하고 있다. 대부분의 신자가 목포 등 외지에서 오는데 이 마을 주민을 포함한 주변 마을에서 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없다.

▲ 호남 제일의 사찰이 있었던 마을-대치3리 총지

총지는 대치3리에 속하는 마을로 총지와 장동 마을로 이루어졌다. 두 마을 모두 총지사와 관련된 마을로 장동은 총지사가 폐찰되기 전 1700년대 후반에 형성된 마을이고 총지는 총지사가 폐찰 된 후에 세워진 마을이다.

▲ 총지 봉암 한재를 지나는 대치천

壯洞은 1700년대 후반 이천 서씨 덕눌의 후손인 종익(자-은경, 1737-1783)에 의해서 형성된 마을이다. 摠持는 총지사가 1810년을 전후해서 폐찰 된 후에 형성된 마을로 처음엔 송정 마을로 불려졌지만 후에 총지사의 절 이름을 따서 총지로 불렀다. 송정 마을로 불렸던 이유는 울창한 소나무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은 승달산의 맥을 이은 백운산(마협봉이라고도 함)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입구에 두 기의 석장승이 있다. 총지사는 725년에 승달산 법천사와 함께 당나라에서 건너 온 정명이라는 스님에 의해서 세워졌다. 총지사가 처음 세워진 곳은 백운산 기슭이었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불로 사찰이 불에 타자 현재의 터인 백운산 아래로 옮겨 지으면서 총지사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기록에도 호남제일의 사찰이라고 표기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던 총지사가 폐찰이 된 건 명당때문이었다.

▲ 총지사가 있었던 백운산

얼마 전까지 만덕사라는 암자가 있었다. 사깃등 옆에 있었던 조그만 암자인데 神氣가 있는 보살이 운영하였던 것이다. 후일 대치리 입구에 있는 현재의 호국사로 이주해 절세를 확장했다. 마을에서 청계 태봉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각커리재라 부른다. 산너머 우적동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각커리재는 가거리재에서 비롯된 말로 가히 살만한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주민인 이 봉씨가 안골에서 밭을 갈다가 금부처 3개를 발견했다고 한다. 처음엔 시커먼 철제 장난감이 녹슨 것으로만 알고 대수롭지 여겨 마당에 놔두었다가 소문을 듣고 찾아 온 일본인들에게 확인한 결과 금부처임을 알게 되었다. 후일 일본인들이 달라 하자 아무 소리 못하고 뺏겼다고 한다. 다행히도 일본인들은 금부처를 가져가면서 소한마리 값을 주고 갔다고 한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이 절이 불타면서 값비싼 유물들을 건져내지 못해 지금도 금부채[金扇], 금바둑판, 금동자상, 금불상, 금마(金馬), 청기와 등이 매장되어 있다고 주민들은 믿고 있었으며 외지 사람들이 묻혀진 유물을 찾기 위해 찾아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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