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문화원장 백창석

[무안신문] ▲ 세 명의 인물과 세 명의 부자를 기다리는 마을-복룡1리 복룡촌

복룡촌 마을은 밀양박씨 집성촌으로 옛등과 본마을로 이뤄졌다. 일로읍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5㎞ 가량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황우봉을 기점으로 몽탄면과 경계에 있다. 무안군에서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백련지 가꾸기 사업의 덕택으로 마을의 모습이 점차 새로워지고 있다. 여러 동의 한옥이 들어서면서 예전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지명의 유래는 두 가지로 전해온다. 하나는 밀양 박씨 족보에 나오는 목동(牧洞)이라는 이름이다. 이는 마을의 뒷산이 황소가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황우봉(황우뫼, 황우산, 황골뫼)이라 부르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또 하나의 지명은 마을의 앞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해서 안산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 산의 지형이 困龍得水의 지형으로 마치 피곤에 지친 용이 영산강 물을 만나 승천하기 위하여 엎드려 있는 형국이어서 복룡으로 부르고 있다. 호구총수의 기록에는 목동이 아니라 지금의 마을 이름인 복룡촌으로 나온다.

▲ 복룡촌 마을전경

또한 안산에 세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이 ‘저 봉우리로 인하여 이 마을에 세 명의 인물과 세 명의 부자가 태어날 것이다’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주민들이 인정할만한 부자나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예전 이름인 목동(牧洞)에 걸맞게 소를 많이 키우고 있다. 퇴비공장도 있다.

예로부터 이 마을의 터가 ‘밥은 없고 손은 넘치는’ 터로 알려져 있어 박씨들의 자손은 번창했으나 크게 부자 된 사람은 없다. 한때는 옆 마을인 사교마을과 합쳐 500세대 4천여명의 대가족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박씨 이외의 성씨들은 손도 귀하고 재산도 늘어나지 않아 대체로 이 마을에 남아 있지 못했다. 현재는 여러 성씨가 어울려 사는 복합마을이다.

▲ 복룡촌 마을 입향조 행적비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영화농장이 들어서고 간척지가 농지로 변하면서 물이 귀해 농사철에는 물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 친척 간에도 많았었다고 한다. 해서 원래는 현재의 백련 저수지를 중심으로 연꽃이 많이 자생하고 있었는데 물 때문에 연이 나오는 대로 주민들이 잘라 버려 없애버리다가 영산강이 막아지고 물이 풍부해지자 비로소 연꽃을 재배하고 단지를 조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연은 성장에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식물이기 때문에 농사지을 물도 없는 상황에서 기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회산백련지를 안고 있는 마을-복룡2리 회산

우리 지역의 대표적인 축제인 백련대축제가 열리는 회산백련지를 안고 있는 마을이 회산 마을이다. 이 마을은 불당봉과 왕해봉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마을 앞으로는 10만평의 회산백련 단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원래는 용호동과 한 마을이었는데 주민수의 증가로 2007년에 분리되었다.

▲ 회산 마을에서 받은 상장들

回山이라는 마을 이름은 영암이나 목포 쪽으로 갈 때 섬을 돌아서 간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은 세상의 모든 기운이 이 마을에 다시 모인다는 의미의 마을 이름이라고 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원래 이 마을은 回島라 불리는 섬이었다. 그러다 조선조 말 현재의 백련지 중간쯤에 둑이 생기면서 육지와 연결되었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그 둑이 있었던 자리에 둑을 막은 민병석씨의 공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백련지 조성 과정에서 없어졌다고 한다.

회산 백련지는 일제의 암울했던 시대에 조상들의 피와 땀으로 축조된 저수지로 의산리의 돈도리에서 양도로 이어지는 원둑이 쌓아지고 영화농장이 만들어지면서 간척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막아놓은 방죽이었다.

주민들이 회산 방죽으로 불렀던 이 방죽은 몽탄면의 당호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와 사용하였는데 면적은 10만여 평으로 두 개의 저수지가 합하여져 인근 250ha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농작물의 젖줄 역할을 하였으나 1981년 영산강 하구 둑이 건설된 후 사실상 농업용수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이 방죽에 처음 백련이 나타난 것은 구원둑이 막아지면서인데 지금은 없어져 버린 저수지 옆 덕애 마을 주민들이 가꾸어 오면서 현재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인가 백련이 없어졌다가 상당기간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민의 이야기로는 백련이 ‘자라는 지역은 신성한 곳이기 때문에 부정을 타면 백련이 모두 죽어버리고 만다’고 한다.

특히 오늘날의 백련단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40여 년 전에 별세한 덕애 마을의 정수동씨 때문이었다 한다. 꿈에 학을 보고 백련과 인연을 맺었다는 정수동씨는 주민들의 오해를 받을 정도로 엄격하게 연꽃을 관리해 현재 동양 최대의 백련단지를 만드는데 초석이 되었다.

▲ 주체적이고 정체성을 갖춘 마을-복룡3리 사교

沙橋는 복룡3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마을 앞으로는 백련로가, 옆으로는 다산로가 지나고 있다. 마을 뒤 元驪峰에는 수령이 백년이 훨씬 넘어 보이는 아름드리의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沙橋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 확실히 알고 있는 주민들은 없었다. 미루어 살펴보건데 지형적인 현상으로 모래둑이 쌓이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 사교마을의 새마을역사관

원래 이 마을엔 나주 임씨들이 터를 잡고 살았으나 오래 전 앞 마을인 광암리로 이사 가고 현재는 한 가구도 남아 있지 않다. 뒷동산이라 부르는 곳에 나주 임씨 선산과 묘들이 남아 있어 예전 이곳이 임씨 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마을 입향조는 1700년대 중반에 들어 온 밀양박씨 박한용(1730 - 1792)이다. 박한용은 복룡1리 복룡촌 마을의 입향조인 박세징(1670-1750. 자-서경, 호-돈옹. 난정공의 손자이며 만연공의 아들)의 손자이다. 이후에 들어온 달성배씨는 달성배씨 복룡리 입향조인 배윤우(1691-1758, 호-晩軒)의 후손들이다.
원래 마을 앞을 지나 광암 상신기 마을 앞까지 영산강 물이 들어왔다. 지금의 농지가 조성된 것은 조선시대에 세 차례의 간척을 통해서 형성한 것이다. 처음에는 사교 앞 마을에서 학두리까지 천방둑이라 부르는 1차 제방을 쌓고 2차는 복룡촌에서 용호동까지, 3차는 양호도에서 선창목까지 제3농장이라 부르는 둑을 쌓으면서 현재의 넓은 들이 만들어졌다. 어른들은 ‘천방둑은 나주임씨 상주공 임타가 회산에 거주하면서 막은 것으로 인간이 막은 둑이 아니라 하늘이 막은 둑이라 해서 하늘 天을 써서 천방둑이라 했다’한다.

이 마을에는 특이한 기록이 많다. 우선 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있을 때 이 마을은 전국적인 시범 마을이었다. 주민인 박창표씨에 의해서 기획하고 추진하였던 이 마을의 새마을 사업을 본받기 위한 필수 코스가 되기도 하였다.

▲ 사교마을 옆 능선에 고인돌이 있다

독자적으로 마을 역사관을 갖고 있다. 새마을 역사관이라 이름 붙인 이 자료실은 아직 자료 정리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국적으로 보아도 자체적으로 역사관을 갖고 있는 마을은 드물 것이라 여겨진다.

이 마을은 몇 해 전에 별세한 우리 지역의 마지막 선비라 일컬음을 받았던 勉窩(면와) 배회두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선생은 주경야독으로 깨우친 학문을 바탕으로 우리지역학문을 이끌었으며 무안유도회장과 무안향교의 전교를 역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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