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문화원장 백창석

[무안신문] ▲ 돌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있는 마을-상마1리 상마정

상마정 마을은 청계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3㎞쯤 가면 나오는 마을로 행정구역으로는 청계면 상마1리에 해당된다. 마을이름의 유래에 대하여 주민들은 뒷산인 상곡봉의 형태가 말의 모습과 흡사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마을에 처음 들어가 보면 마을이 상곡봉을 주산으로 해서 야트막한 야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아늑함과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마을 앞에는 67-68년 大旱害를 겪고 나서 축조했다는 상마 저수지가 있다. 조그마한 저수지인데 마을 앞 농경지의 농업용수로 쓰기 위하여 쌓은 것이다. 그 옆에 당산나무가 서 있는데 둘레가 3미터 이상이나 되고 수령이 300여년이 넘음직한 나무이다. 주변에서 보기 드문 괴목 나무로 나무의 한쪽 부분이 화석이 되어 죽어가고 있었다.

▲ 상마정 입석

마을에서는 돌과 관련된 일화가 많이 있다. 마을 앞 정자 옆에 있는 입석은 길이 2미터 30, 둘레 1미터 60의 크기인데 오래 전에 마을에 전염병 등 횡액을 막기 위해서 세워진 돌이다. 그런데 1990년대에 마을 앞 논을 경지정리하면서 입석을 건드려 넘어지게 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바쁘다는 핑계로 입석을 방치해두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입석을 건드렸던 사람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急死해 버린 것이다. 그 이후 마을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우환이 자주 일어나 주민들은 입석이 넘어져서 오는 일이라 여기고 입석을 다시 세워 놓았다.

또 하나 있다. 이 마을에서 구로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병목재라 한다. 마치 병의 목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그 재에는 ‘병마개’라 부르는 넓은 돌이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그 부근에서 공사하면서 돌을 움직여 원래의 위치에서 벗어나게 되자 그 때부터 마을 주민들이 이유를 알 수 없는 피해를 봤다고 한다.

마을 왼쪽에는 독배기라 부르는 둔덕이 있는데 이곳에 상산 김씨의 묘지가 있다. 예전에 이곳에는 아름드리의 소나무들이 많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현재는 조그만 나무들이 묘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곳에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고인돌이 11개가 발견되었는데 묘지 주변에 묻혀 있는 고인돌도 보이고 있어 더 많은 고인돌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지석묘의 굄돌 중에서 길이가 2미터 60이 넘는 돌도 있었다. 독배기 뒤에는 비닐재생공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도청에서 공항까지 가는 4차선 도로 공사를 하고 있어 독배기는 없어졌고 비닐공장도 없어졌다.

▲ 상마정 마을의 고인돌

마을 뒷산인 상곡봉을 ‘웃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웃골에는 금스렁골이라는 습지가 있다. 그 습지 위에는 여자의 성기를 닮은 바위가 있어 주민들은 그 바위를 ‘**바위’라 부른다. 그 바위의 오목한 곳에는 한 종지 가량의 물이 늘 괴어 있다고 한다. 그 물을 떠다가 남자들이 먹거나 바르면 남자 성기와 관련된 병들은 대부분 낫는다고 한다.

▲ 옹관묘와 토기가 발견된 마을-상마2리 下馬亭

하마정 마을은 청계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3㎞쯤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행정구역명으로는 청계면 상마2리 하마정인데 한때는 용마 마을로 불려지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마을은 잔등을 사이로 하마전과 용계 마을로 나뉘어져 있는데 주민들이 용계의 ‘용’자와 하마전의 ‘마’를 따서 용마 마을로 고쳐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마정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관리인 송감사와 관련된 것에서 비롯된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현재 하마정 마을 입구에 해당하는 죽림 지역에 송감사라는 관리가 살고 있었다. 주변에는 솔대가 서 있었고 그 앞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 마을을 지나갔다가 상마정이란 곳에서 말을 다시 타고 지나갔다’고 한다. 즉 말에서 내려 걸어 간다고 해서 ‘下馬亭’ 그리고 다시 말을 타고 간다고 해서 ‘上馬亭’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하마정 마을의 당산나무

이 마을의 입향조는 알 수가 없다. 구전에 의하면 여산 송씨가 제일 먼저 들어왔다고 하는데 기록이나 흔적이 없다. 현재는 한양 조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들의 조상은 기묘사화의 화를 피하기 위해 숨어 살아온 사람들이다. 즉 조선 중종 때 조광조로 인한 기묘사화의 변을 당한 한양 조씨들 중 일부가 감방산의 줄기인 돗재(무안읍 매곡리 도산 주변)에서 숨어 살다가 살길을 찾아 신안군 압해면 가란리로 옮겼다. 그곳에서 일가를 이루어 살면서 120여년 전에 이 마을로 조귀철(자-행직, 호-승곡. 1863-?)이 처음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그때 이미 송씨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학계에 확인되지 않은 선사시대를 비롯한 고대의 고분들이 주민들에 의해서 발견되거나 도굴꾼들에 의해서 파헤쳐진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30여년 전에 용계 마을의 왼쪽에 있는 서당골에서는 전문 도굴꾼으로 보이는 사람들에 의하여 수십 점의 백자와 수저, 젓가락 그릇 등이 발굴되어 무단으로 가져갔다. 40여년 전에도 이 마을 주민에 의해서 분무골 또는 분모골이라 부르는 마을 뒷산 정상에 있는 옹관묘가 큰 옹관을 중심으로 작은 옹관들이 여러 개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현재도 가서 발굴해보면 많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용계 마을의 왼쪽은 붓단산(불당산)으로 부른다. 또한 앞산에는 한새꼬빼기라는 지명이 있다. 한새는 황새를 가리키는 말로 앞산의 지형이 황새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산의 입구가 황새 코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청계에서 하마정으로 들어오는 곳에 배다리가 있고 그 아래에 가매배다리라는 지명이 있다. 예전에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는데 청계쪽으로 나가려면 건네야 하는 다리로 함평 고막원의 다리처럼 커다란 돌로 정교하게 쌓았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가매배다리에는 슬픈 전설이 어려 있다.

▲ 장등 표지석

▲ 일제 강점기에는 청계면의 중심지였던 마을-상마3리 평림

平林은 상마3리에 속하는 마을로 윗평림 아랫평림 장등으로 이루어졌다. 평림은 기록에 따르면 원래 죽림 마을로 불려졌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예전의 마을 주변은 대나무가 많았으나 개발로 인해 현재는 대나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현재의 이름인 평림으로 바뀌어졌다.

▲ 평림 마을전경

이 마을의 입향조는 뚜렷하지가 않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조선말기 여산송씨와 나주나씨가 처음 입향하였다’고 하는데 주민들의 의견은 다르다. 여산송씨와 나주丁씨가 처음 들어온 것은 맞는데 현재 거주하고 있는 송씨들과는 계열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 마을은 승달산의 지맥인 깃대봉과 매봉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매봉산의 밑에는 미래봉이 있는데 미래는 못자리를 고르는 데 쓰는 농기구로 지름이 두 치 반가량 되고 길이가 다섯 자 가량 되는 곧고 둥근 나무 한가운데 긴 자루를 박아 쓰는 농기구를 말한다. 매봉산의 매가 엎드려 있는 꿩을 보고 있는 형국으로 복치의 자리는 현재 상마 삼거리 주변을 말한다(청계중학교를 복치혈로 보기도 한다). 예부터 복치의 자리는 천석군이 나올 수 있는 자리라고 하는데 실지로 그 자리에 수천석의 벼를 저장할 수 있는 창고가 세워졌다. 하지만 마을 앞에 보살봉이 있어 다른 해석을 하기도 한다. 즉 마을이 보살봉 앞에서 염불을 하는 형국으로 있어 부자들이 나올 수 없다고도 한다.

조선시대에 이 마을에는 장송장이라 부르는 5일 시장이 있었다. 장등이란 지명이 있어 시장을 확인할 수 있는데 주민들에 따르면 우시장도 겸해서 열렸던 큰 시장이었다. 지형적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지역으로 마을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운송로도 좋았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는 이곳이 청계면(당시는 일서면)의 중심지였다. 장등이라 부르는 곳에 면사무소와 지서가 있었으며 폴리텍 대학 자리에는 일본인의 신사터가 있었다.

예전에 이 마을은 빈촌이었다. 녹두밭 웃머리라고 자조적인 말을 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던 마을이다. 토지가 좁을 뿐 아니라 있는 토질도 박토여서 농작물을 재배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관개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있는 토지들도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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