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문화원장 백창석

[무안신문] ▲ 조선시대 전선창이 있었던 마을-이산1리 배뫼

배뫼 마을은 천하봉을 주산으로 하고 신선봉과 깃대봉으로 둘러싸여 있다. 특히 한글 이름으로도 매우 토속적인 느낌을 주는 지명이다. 지금까지 이 마을의 이름을 놓고 말이 많았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 유래지에서 기록한 것처럼 ‘마을 뒷산 모양이 배형[舟形]과 같다하여 舟山으로 부르다가 일제강점기 때 利山으로 개칭되어 어원상 梨자에 따라 ‘배뫼’라 부르게 되었다‘는 의견과, 예전에 이곳에 전선창과 강정포구가 있어서 배를 매었다는 뜻의 ’배매’ 가 ‘배뫼‘로 변해 이를 한자로 써서 ‘梨山里’로 했다는 의견, 또 일본인이 순수한 우리 말인 ‘배뫼’를 한자로 바꾸었다는 의견 등 여러 가지 말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번 탐방에서 여러 가지 說들을 잠재울 수가 있었다. 이 마을의 뒷산에 천하바위가 있어서 이 산을 천하봉이라 부르는데 예전에는 그 산에 배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강을 이루고 있었다. 배꽃이 피어있는 봄날에는 어느 절경에 부럽지 않을 정도였을 거라고 회상한다.

▲ 배뫼 마을 비래봉에 있는 식영정

해서 이 마을의 입향조인 한호(閑湖) 임연(林堜 1589-1648)이 영산강을 따라서 머무를 곳을 찾아다니다가 이 절경을 보고 당시 이 마을에 살고 있던 방씨들에게 남원에다 代土를 마련해주고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 당시 방씨들이 살았던 곳은 신선봉 기슭으로 주변에 집성촌을 이루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나주임씨 한호공파 종가

이 마을은 특이 하게도 모두 동쪽으로 문을 냈다. 주산인 천하봉이 서쪽에 있어 동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마을의 주 통행로가 동쪽으로 나있어 동구테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이 마을의 지형을 보면 U 자형이다. 도도히 흐르던 영산강의 물이 이곳으로 들어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대해로 나가는 지형이다. 군사적으로 보면 천혜의 요새로 보이기도 한다. 해서 조정에서는 1481년 이곳에 戰船을 만드는 전선창을 세워 영산강의 해로와 서해 무역항로를 아우르는 군사 요충지로 삼았던 것이다.

실지로 전선창이 있었던 주변에서 일제강점기 때 투구가 나오고 나무를 잘랐던 활과 화살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주민들은 어렸을 때 비래봉 주변에서 투구와 화살을 봤다고 한다. 해서 ‘귀신이 나오는 곳’이라 하여 근처 가지 않았다고 한다.

전선창이 없어지고 난 다음에 이곳에는 포구가 형성되었다. 강정포구라 부르는 이곳은 목포항이 개발되기 전에는 포구 주변에 비동이라는 마을이 있어 100여 호의 인가가 있었을 정도로 번성했다고 한다. 또한 주막도 여러 군데가 있어 굉장히 흥청거렸던 곳이었다.

이 마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息營亭이 있다. 영산강변에 우뚝 서있는 이 정자는 원래는 1630년대 비래봉 위에 입향조인 한호공에 의해서 세워졌는데 불이 나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이곳의 식영정은 영산강변 제일의 정자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있으며 영산강과 닿아있는 비래봉 아래의 바위에는 무안에서 유일하게 四言의 암각시가 새겨져 있다.

또한 문화재로 등록은 안 되었지만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古宅이 있다. 나주 임씨 정자공파의 종가인 임복의 유택이다. 기록에는 중종 26년(1531)에 병조판서를 지냈던 임복이 건립했다고 했으나 주민들은 입향조인 한호공이 정자공파의 종가로 지었던 집이라고 한다. 당촌 마을은 예전에 서낭당이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도 마을 뒤 고개 이름을 당치(堂峙), 또는 당재라 한다. 당시 당재에는 서낭당이 있었다. 그 옆에 두 아름이 훨씬 넘는 도토리 나무가 60년대까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곳에 재를 지냈던 것이다.

당촌은 나주 오씨의 자작일촌 마을로 입향조가 배뫼 마을로 장가를 가서 형성된 마을이다. 과거에 영산강을 오가는 대부분의 배들은 당치에서 제를 지내거나 특별한 의식을 행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 천하명당 최부 묘가 있는 마을-이산2리 늘어지

▲ 어오지 마을의 최부의묘

몽탄면 소재지에서 철도를 넘어 세워져 있는 육교를 지나 2㎞ 쯤에 나오는 식영정을 거쳐 조금 더 가야 만날 수 있는 마을이다. 행정구역명으로는 몽탄면 이산2리 어오지 마을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정확하지가 않다. 배뫼에서 살던 나주 임씨들이 농지를 찾아 이곳에 하나 둘 정착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기 때문이다.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마을 이름이 보이지 않으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부터는 어오지리로 나온다. 운남면의 양곡마을도 어오지라 불렀다.

그러나 풍요롭고 여유가 넘쳐 보이는 이 마을도 영산강이 막히기 전에는 무안에서 가장 늦게 모내기를 마칠 정도로 하늘만 바라보는 농사를 지었다. 즉 천수답이 대부분이어서 군내에선 제일 빈촌에 속했다. ‘몽탄의 북만주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만큼 척박한 환경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영산강이 막히고 농지가 늘어나고 지하수가 개발되면서 주민들의 살림이 펴지고 현재는 생활보호대상자가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생활의 여유를 갖고 살고 있다. 더 나아가 마을 개발에 큰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 어오지 마을의 김치 저장고

마을에서 위로 조금 올라가면 영산강을 曲江이라고도 부르게 만든 새 乙자의 굴곡진 형상을 한 곳이 있다. 이른바 장구부라 부르는 곳이다. 長丘(久)阜는 마을 왼쪽의 봉우리인 조리봉에서 뻗어 내려온 줄기가 둥글게 활처럼 휘어진 형상으로 언덕을 이루고 있는 마을 이름이다. 강 건너 동강 빈재 전망대에서 이 마을을 보면 마치 한반도의 지형을 보는 것 같다.

마을 앞을 지나고 있는 영산강 관광도로는 뒤구지라는 곳에서 범바위를 앞에 두고 멈춰 섰다. 범바위는 마을의 주산인 신선봉이 연징산 줄기를 따라 힘차게 나주를 향해 달려가다가 영산강물에 막혀서 우뚝 서 버린 바위를 말한다. 옆에서는 제 모습이 보이지 않으나 강 건너 나주에서 보면 범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범바위 앞으로 길을 내려고 했으나 수심이 너무 깊어 공사비가 많이 들고, 범바위를 깎아 길을 내려고 했으나 범바위에 상처를 내면 마을이나 관계자들에게 재앙이 미친다 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탐방에서는 범바위 밑으로 굴을 뚫어 관광도로가 개설되고 있었다.

▲ 범바위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아들바위라는 바위가 있었다. 몽탄에서 강정포구를 지나 당재를 넘어서면 마을로 오는 길로 들어선다. 새석골을 거쳐서 아들바위가 있는데 지금은 길이 나면서 없어졌다. 아들바위에서 조금 가면 조그만 포구였던 가새가 나온다. 물론 이곳도 흔적만 남았다. 아들바위는 오직 아들만 바라보고 살던 한 할머니가 고기 잡으러 갔던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바위에 올라 아들을 기다리며 죽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마을회관 앞 길 건너에는 ‘표해록’을 지었던 금남 최부 父子의 묘와 사당이 있다. 최부(1454-1504)는 동양의 마르코 폴로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왕의 명을 받고 제주로 가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 중국을 거쳐 6개월 만에 돌아온 사람이다. 돌아와서 왕의 명으로 표류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엮어서 내놓으니 그것이 유명한 중국 견문록인 ‘표해록(漂海錄)’이다.

후에 임금이 최부의 공을 높이 사 최부에게 소원을 물으니 “저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임종도 치르지 못한 저의 선친을 편하게 모시는 것입니다”. 하자 임금은 곧 國地官을 보내 전국의 좋은 터를 알아보게 했다.

국지관이 남도의 여러 곳을 둘러보다 이곳에 왔는데 마침 명당으로 보이는 지점이 있어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때는 동지섣달인데도 칡꽃[葛花]이 피어 그윽한 향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었다. 이른바 명당으로 일컬어지는 葛花浮水의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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