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신문] ▲ 萬戶가 들어서 번창하게 될 마을 - 성남3리 萬昌

만창은 성남3리에 속하며 앞으로 萬戶가 들어설 정도로 번창하게 될 것이라는 지명 유래를 갖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유래지에는 ‘남문 밖 남쪽에 있는 마을로 선조 때 만호창이 있었던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만호창이 있었다는 소리를 처음 듣는다고 했다. 또한 기록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마을에는 원래 신씨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살고 있지 않다.

이 마을의 경계는 전신전화국 앞길에서 범산골 그리고 아뜨리움 아파트까지이며 무안고와 무안교회를 포함하여 물맞이고랑까지 연결된다. 미륵사 백제고 초당대 초당요양병원 등이 영역에 속한다. 마을이 넓다보니 열두 고랑으로 표현하기도 하며 마을 경로당이 두 군데나 있다. 마을 이장은 세대수가 많다보니 주민들의 의견을 취합하기가 어렵다고 하소연 한다.

현재의 만창 마을은 지명의 유래처럼 만호가 들어설 정도로 번창하고 있다. 우선 1979년도에 실시된 취락구조사업으로 주거환경을 개선하였다. 또한 백제고와 초당대가 들어서면서 젊음이 넘치는 마을을 만들더니 인재의 요람인 무안고가 얼마 전에 들어서면서 명실상부한 학사촌이 되었다. 예전에는 별다른 소득원이 없어 가정경제에 대단히 어려움을 겪었던 마을이었다. 그러나 학교들이 들어서면서 마을 상권이 살아나고 학생들을 수용할 방이 부족하자 양파저장고로 사용하던 창고마저 방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제공했다.

▲ 만창마을에는 무안고 백제고 초당대가 들어서있다.

백제고등학교 옆에 있는 골짜기가 범산골이다. 호랑이 모양을 한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그런데 예전 범바위 주변에 숲이 없을 때는 이 마을의 개들이 남아나지 못했다고 한다. 개들이 살지 못하고 죽거나 도망 가 버린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바위 주변에 숲이 들어서고 마을에서 범바위가 보이지 않자 그때부터 마을의 개들이 잘 될 수 있었다고 한다.

미륵사 아래에는 물맞이 고랑이라 부르는 선랑폭포가 있다. 예전에는 여름철이 되면 이곳 물맞이고랑에 물 맞으러 가는 아낙네들로 마을 앞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물맞이고랑의 물을 맞으면 관절염을 비롯한 신경통에 특효가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농번기를 보낸 영광 함평 등 곳곳의 아녀자들이 물 맞으러 오기 때문이다. 특히 물을 맞을 때는 부정을 타면 안 된다는 말이 있어서 물 맞는 날에 뱀을 보거나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으며 아무리 멀리서 왔다 하더라도 물을 맞지 않고 다시 돌아갔다고 한다.

▲ 만창마을의 물맞이 공원 모습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무안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는 마을이다. 1919년 3월 19일 무안 장날 이 마을 강지석(만창리)을 포함한 김한근(상사지) 박용규(성내리) 등 24명이 중심이 되어 남산 조산등(현재 충혼탑이 있는 자리)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준비한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누어주며 장터로 만세를 부르면서 행진했던 것이다. 만창리 독립만세 운동 또는 무안만세운동으로도 부르는 이 운동은 3.1운동 이후 전남에서 최초로 일어난 운동이기도 하며 불의에 맞서 싸웠던 동학의 정신을 계승한 독립운동이었다.

▲ 붉은 고개를 안고 있는 마을-성남4리 큰골[大谷]

▲ 대곡마을에서 탐방을 마치고 찰칵

대곡 마을은 우데미 아래데미로 이루어졌으며 농업기술센타와 실버요양원을 경계로 청천교까지 영역에 해당된다. 무안읍에서 초당대를 지나 목포 방면으로 1㎞ 가량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행정구역명은 무안읍 성남4리 대곡이다. 원래는 하나의 마을이었는데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이 지나가면서 두 개의 마을로 나뉘어졌다.

마을의 원래 이름은 승달산의 맥을 이어 연징산에서 내려오는 골짜기에 큰 마을이 있다 해서 大洞이라 했었다. 그런데 소화 2년(1927년)에 일본인들이 청계에서 무안으로 들어오는 다리 공사를 할 때 일본식 이름인 대곡(大谷)으로 바꿔 부른 것이 지금의 마을 이름이 되었다.

마을의 형성은 마을유래지에는 ‘김해김씨 金贊植이 임진왜란 때 이 지역으로 피란을 와, 이곳에 터를 잡아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주민들은 기록과는 다르게 이씨, 김씨, 송씨 등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형성했다고 하는데 누가 먼저 들어왔는지 언제 들어왔는지 이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으며 확인할 자료도 없다.

이 마을은 우리 지역 불교 전래에 관심을 끌만한 지명이 있다. 마을 뒷산에 중봉(스님봉)과 바랑(바라)봉 목탁바위가 그것이다. 그리고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중봉에서 내려온 스님이 마을을 향해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부르는 ‘나매미’라는 지명이 있으며 옆 마을인 청천리 앞 들판도 불교와 관련이 있는 지명인 ‘나분들’이 있다.

이 지역에는 동학과 관련된 지명이 전해오고 있다. 이른바 붉은 고개 또는 붉은 잔등이 그것이다. 현재 무안고와 무안교회 부근으로 동학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서 피를 흘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즉 고막원 전투가 실패로 끝나자 동학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피할 곳을 찾아 섬으로 가는 길이었다. 토벌대들이 미리 붉은 고개 주변에 진을 치고 대기하고 있다가 보이는 대로 학살했던 현장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던지 핏물이 강을 이뤘다고 한다. 또한 동학 혁명 때 이곳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다. 즉 집강소가 있었던 청천리와 관아(官衙)가 있었던 무안읍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예전에는 한낮에도 이 고개를 넘을 때면 몸에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새마을 사업이 한참 시작이 될 때 이 마을에서는 미이라가 발견된 적이 있었다. 현재 농촌지도소가 있는 주변을 ‘방애미재’라 하는데 방애미재 앞에서 광주 - 목포간 도로 공사 중 발견된 것이다. 이곳에는 밀양 박씨 문중의 커다란 묘가 있었는데 그 묘를 옮기는 과정에서 깨끗하게 원형이 보존된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이른바 물 명당에 해당된 묘 터로 수맥 때문에 수백년이 지났는 데도 시신을 감쌌던 옷이 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시신도 탈골이 되지 않아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축구장이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 예비군 훈련장이 있었던 골짜기 주변을 삼바실 고랑이라 한다. 옛날은 물론이지만 근대에 들어서도 주민들이 그 고랑에서 산삼을 캐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지로 이 마을 주민 중 한사람이 그곳에서 삼을 캐서 먹고 그 자리에서 잠들었다 깨어난 적도 있었다. 그 주민은 장수했다.

마을에서 대곡저수지로 가는 길 가에 바위가 하나 있다. 일명 ‘독바위’라 부르는 것인데 수명바위이기도 하다. 주민 중 김석암이란 사람의 사주가 단명으로 나타나자 그의 부모는 바위에 이름을 팔기로 했다. 해서 그 바위는 석암씨의 이름을 따 독바위가 되고 석암씨는 91세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주민들 대부분이 홀로 된 할머니들이 많다. 왜 유독 이 마을만 홀로 된 할머니가 많냐고 묻자 1호선 공사 때문에 그런다고 했다. 즉 국도 1호선 공사 때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혈맥을 잘라버려서 남자들이 오래 못산다고 하는 것이다.

저작권자 © 무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