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신문] 무안군 일로읍 주룡땅에 와룡선생이라 불리는 호국의 선봉인 소포공(嘯浦公) 나덕명의 소리가 들린다.

‘북관도 높은 하늘에 오고가는 저 구름아 기러기마저 무정하구나. 이 외로운 성이 어디 매인고. 외로이 부모형제를 그리는데 가을밤은 깊어 촛불마저 가물거리고 서리 맞은 낙엽소리도 처량하구나. 꿈에 본 연못 가운데 수초가 잘 자라지 못하고 있으니 마치 내 신세 같구나.’

함경도 지방에서 유배생활의 심정을 읊은 소포공 나덕명의 시다. 공은 명종6년 신해년(1551년) 8월 8일 나주읍에서 좌찬성 사침(士沈), 파평윤씨(坡平尹氏) 언상(彦商)의 딸 사이에서 6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극지(克之), 호는 소포(嘯浦) 또는 귀암(龜菴)이다. 공이 29세인 1579(선조 1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의 벼슬을 하였고 후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끝난 뒤에는 고향에서 야인으로 보냈다. 저서로는『소포유고』가 있다.

그의 아버지 금호공 나사침(錦湖公 士沈)은 16세에 어머니 병을 치료하기위해 손가락을 절단하여 피를 목에 넣는 효행을 하였고, 아들 손자등 3대에 걸쳐 삼강(三綱)으로 일곱 번 장려를 받은 효와 예를 갖춘 명문집안이다.

공은 율곡이이 문하에 들어가 글을 익혔다. 후에 율곡선생이 공에게 朱子語類 한질을 주시면서 이이선생의 추천으로 정개청의 문하로 옮겨 학문을 닦았으나 후에 귀양살이의 화근이 되었다. 공이 28세인 선조12년(1579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박순(朴淳)의 천거로 承訓郞 義禁莩事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선조22년 기축년 공의 나이 38세때 鄭汝立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죄목으로 함경북도 鏡城땅으로 귀양갔다. 정여립사건은 전주사람 정여립이 전북진안에서 奇人·謀士를 모아 大同契를 조직하고 반역을 도모했던 사건으로서 이로 인해 己丑獄死가 일어났다. 그 후 전라도는 반역지역이라 하여 등용이 제한되었다.

소포공은 귀양살이 3년만인 1592년 4월 공의 나이 41세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 곽재우, 고경명, 김천익등 전국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났고, 이때 소포공은 의병을 일으켜 정문부와 함께 관북지방을 평정하였다. 정문부는 막하 장병들의 전공과 함께 소포공의 전공도 자세히 기록하여 조정에 올렸다. 이 공로로 공은 마침내 계사년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그는 갑오년에 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가자 고향인 나주로 돌아왔다. 고향에 온지 3년만인 병신년(1596년)에 아버지 금호공이 71세로 세상을 떴다. 公은 아버지 묘를 무안군 일로읍 청호리 주룡 망모산 아래에 쓰고 3년동안 시묘했다. 그 뒤 무안군 일로 주룡의 절벽위에 적벽정이란 정자를 짓고 나날을 보냈다. 적벽정이 서있는 낭떠러지는 기암절벽아래 강물이 굽이쳐 흘러 풍광이 수려한 곳에서 책과 자연을 벗 삼아 소일했다. 정자 밑 바위 틈새에는 비들기들이 서식했다 해서 주민들은 鳩岩(구암)이라 부르며 강물엔 용을 길렀다 해서 용소라 부른다. 주룡住龍이란 마을 이름도 여기에서 연유했다.

또한 소포공은 영산강 지류를 막아 저수지를 만들고 수백정보의 논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소포들이라고 불리는 무안군 일로읍에 있는 평야이다. 公은 또한 영산강이 막혀 교통이 불편함을 알고 몽탄, 삼선, 주룡, 좌창등 네 곳에 선박을 이용한 교통편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기해저병서(己亥低兵書)란 책을 저술한 公은 그 속에서 패정을 개혁하고 둔전을 없애며 탐관오리를 제거하고 민폐를 구할 정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公은 경상도에서 맨 처음 의병을 일으킨 망우당(忘憂堂) 곽재우와 평소 교분을 두텁게 가진 사이였다. 두 사람은 적벽정 바위에 바둑판을 그려놓고 곧잘 대국했으며 곽재우는 公을 가리켜 ‘臥龍선생’이라 불렀다. 소포공은 첫째부인인 담양부사 김경헌의 따님이신 광산 김씨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 번째 맞이한 부인인 부사절의 따님이신 문화 유씨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고 광해군2년인 1610년5월28일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순조때 윤광보가 임금께 장개를 올려 정려(旌閭)가 내렸으며 나주의 금호사와 충장사, 금산의 금곡사, 금성의 장열사, 무안일로의 소포사嘯浦祠에 각각 배향되었다. 금산대첩비에도 公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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