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금남 발행인
새해가 바뀌면 늘 우리는 새로운 계획(희망)을 세우고 꿈을 꾼다. 그러한 계획은 지난해도 이맘때쯤 어김없이 반복했던 계획들이었다. 그리고 또 1년 전 아니 수년전의 반복된 계획을 세워 꿈을 꾼다. 어쩌면 내년 이맘때도 똑 같은 계획을 세울 지도 모른다면서도 막연한 기대감에 또 희망이랍시고 올 한해를 다시 신미년 세월에 몸을 실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라 칭송받은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시다. 책상에 앉으니 문득 아른 거리는 대목이 생각나 시를 찾아 전문을 게재해 봤다.

이 시는 슬픔과 우울함을 담담히 받아들이라고 당부한다. 세월이 흘러가면 눈물과 고통은 사라지고 기쁨과 행복의 날들이 다가온다고 일러 준다.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이란 시구에서 오늘이 어렵더라도 내일은 삶의 음지를 양지로 바꾸는 것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가능하다고 일러 준다.

미국의 시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도 겹쳐 됐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과거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을 만큼 유명한 시다.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인 인생을 ‘길’로 상징한 이 시는 삶을 관조하는 지혜를 보여 준다. 한 번 선택한 것은 되돌릴 수 없어 아쉬움은 있을 수 있지만 인생에서 선택이란 서로 다른 결과를 내는 것일 뿐, 잘못된 선택이란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들 두 시는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잘 대변해 준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유행병처럼 자신을 되돌아보는 습성이 있다. 무언가 달라지기를 바라고 주변이 변화되기를 원한다. 이런 기대감과 희망이 지금까지 나를 끌고 오면서 어느덧 중년의 반환점을 돌게 했다.

지난 한해도 열심히는 살았지만 그 의욕이 오히려 욕심이었다 보니 결국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도 어제와 똑 같은 일을 하면서 내일의 변화를 꿈꾸고 있는 나.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 될진 데 열심히만 살면 내일의 기적이 일어날 것으로 믿고 모든 사람들은 살아고 있다. 무엇보다 불통, 불신, 불감증 등 3불이 일상화된 답답한 삶 속에서 남의 탓만 했던 것도 사실이다. 가족 그리고 지인들과 얼마만큼 소통하고 신뢰하며 배려하고 살았을까?

가정에서는 가장이라는 허울만 가지고 하숙생처럼 들락거리면서 왕따 당하고 있음에 화를 내기도 했다. 대화보다는 지시로 일관했던 가족간의 소통, 자식들에게는 내가 실패한 삶을 살아 주기를 바라며 리모컨 역할을 했던 것도 왕따로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그리고 반성은 했지만 실천은 못한 채 그들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 욕심이 변했다고 믿고 있는 듯도 싶다.

확대해 되돌아보면 사회를 바라 본 시선도 가정을 바라보는 시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2014년 우리나라는 분노와 울분을 삭이지 못한 채 무기력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속출한 한 해 였다. 세월호 참사에 따른 공범의식은 아직 속죄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상식의 사회가 사라지고 불신이 판을 쳤다. 특히, 사법과 치안기관이 민주주의를 비웃었고, 방산·원전 비리 같은 유착성 부패가 판을 친 가운데 국민들은 꿈을 잃고 한없이 위축됐다.

그런데도 지난해 수치상으로 우리나라 경제성적은 좋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수치는 국민에게는 전혀 체감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만큼 서민들의 삶은 힘들다는 얘기다. 지배층은 이미 만원이고, 기업은 천문학적 유보금을 챙겨두고 있지만, 시중에 돈이 돌지 않는다. 피케티의 말처럼 ‘21세기 저성장 시대엔 상속자본이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처럼 한국 자본주의도 상층 계급의 자녀들에게만 지배클럽 회원증을 발행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중산층이 붕괴하고 내수 위축은 양극화가 심각하게 진행 중임을 뜻한다. 곧 중산층이 얇아지면 사회통합, 관용 등의 국민적 기초도 붕괴되게 되어 있다.

모든 갈등은 하나로 흐르는 맥이 있다고 한다. 그 맥의 중심에는 정치인과 기득권이 서 있다. 때문에 갈등 치유의 궁극적 해법을 갖고 있는 정치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역내 갈등 극복도 기득권의 반성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을미년 새해를 맞아 한파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열린 해맞이 행사에는 한해의 소망을 비는 국민들로 북적거렸다. 정치권도 단체장들도 신년사를 통한 메시지의 공통분모는 경제회생과 민생에 하나같이 방점을 찍고 있다. 박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경제의 활력을 회복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라며 “국민소득 4만불 시대를 여는 기반을 다져가겠다”고 경제회생을 올해의 정책화두로 내걸었다. 문제는 어떻게 실제적 정책으로 추진될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연말연시 영혼없는 식상한 문구로 인쇄된 단체장, 정치인들로부터 몇장의 카드를 받았다. 어찌보면 부모님의 특별한 날 어린 자식들이 똑같은 판박이 말로 삐툴삐툴 적은 편지만 못했지만 그나마도 나는 아무에게도 편지 한 장 쓰지 못했고, 연하장 한 장 보내지 않았다.

지금도 집안 책상 서랍 속에는 중학교 2학년 때 친구에게 받은 크리스마스카드가 있고, 젊은 시절 주고받은 수십년 된 편지들이 간직돼 있다. 카드는 천혜절경 등 다양한 풍습을 보여주는 사진들로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다. 지나간 젊음을 그립게 한 추억을 안겨 준 순수했던 그 친구들에게도 편지 한 장 전화 한 통 못하면서 새해 꿈을 꾸었다.

받을 사람을 생각하면서 내 마음을 전달 해줄 카드를 골랐던 그런 순수한 감정으로 변화를 가져 보려 한다. 삭막하고 각박한 사회 일수록 지인이 곧 희망이고 재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배려와 나눔의 사회로 조금씩 변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저작권자 © 무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