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직감이 있다. 설마하면서 받았던 전화가 허공을 쳐다보게 하는 상황도 직감이다.

며칠 전, 산행을 하고 내려 온 오후 4시쯤이다. 친구에게 걸려 온 전화가 직감적으로 묘한 생각을 먼저 불러 들였다. 아니다 다를까 ‘00친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어느 장례식장인지 좀 알아 봐 달라’고 한다. 순간 허공을 쳐다봤다. 친구의 얼굴이 이미지만 떠오를 뿐 정확한 얼굴이 그려지지 않았다.

선뜩 장례식장으로 달려가지 못하고 하루가 지나서야 그의 생명없는 영혼을 만났다. 니 인생의 종점이 여기였고, 또 이렇게 가야 하는 것인지…

물론 눈물은 나지 않았다. 함께 간 친구들은 아이들이 몇이고 몇살이냐고부터 묻는 되돌이표 말은 역지사지 때문 일게다. 그리고는 애써 친구끼리 마주보며 건네는 말은 농담이 많다. 눈 앞의 현실을 믿으려 하지 않고 농담으로서 자신들의 아픔을 애써 감추려 한다는 것을 서로가 안다. 죽음은 늘 친구처럼 곁에 있었지만 잊고 산다.

새벽에 돌아와 잠자리에 눕자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검은 상복을 입은 그놈의 자식과 아내가 캡처된다.

갑자기 닥친 일에 감당조차 할수 없을 그들의 내일은 어떻게 될까?. 이렇게 먼저 보낸 초중학교 친구들이 반백의 나이에 이르는 동안 20여명에 이른다. 그들이 떠난 후에는 그들의 가족들도 함께 잃어버리고 살아 왔다. 그 착하던 놈들은 심중에 남아 있는 그 한마디 ‘사랑한다’는 말을 가족들에게 하고는 떠났을까.

지난해 어머니를 저 세상으로 보냈고, 올해 둘째 형님을 떠나 보냈다. 그때 나는 그 친구의 자식놈이 섰던 자리에 상복을 입고 서 있었다. 당시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던가?.

이제 주변에는 그동안 인연을 맺어 왔고,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데 의미를 부여해 주었던 나의 주인공들이 속절없이 떠나는 경우가 잦아지는 나이가 됐다. 일방적으로 떠나간 그들의 몇몇은 내 핸드폰에서 전화번호가 지워지지 않고 있는 것도 가끔 발견한다.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찾다가 문득 발견된 그의 이름자에 잠시 찾는 사람을 잊고 막연히 통화버튼을 눌러보면 응답자가 없다.

‘죽은 사람이 불쌍하다’는 사람들의 말에 ‘산 사람이 불쌍하다’고 말을 한다. 일방적으로 떠난 그들에게 우리는 애써 감정이입 시켜 ‘산 사람은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간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갑자기 떠나간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빈자리를 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즐거움이 반으로 줄었고, 그의 무게를 내가 지고 살아가는 삶은 버거울 수 밖에 없다.

말은 흔적을 남기고 향기를 남긴다고 한다. 갑자기 떠날 때를 대비해 우리는 늘 아껴둔 말을 하는 이별연습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상대방이 듣고 싶어하는 말 한마디를 가슴에 감추고 떠난들 무슨 소용이랴!

밖에서 말을 많이 하고 돌아온 날은 어쩐지 허전하고 왜 그 말을 했을까 하는 반성의 날이 많다. 그때면 한적한 곳에서 혼자 독백하듯 자괴감을 느껴보지만 화가 더 미치는 경우가 많다. 그 좋은 단어들을 모두 어디에 숨겨두고 영혼없는 말장난이나 하며 상대에게 아픔을 주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는 말이 난무한다. 싸움하고 모략하고 헐뜯으며 거짓말하며 험한 말을 함부로 한다. 향기나는 말을 하는 사람도 많지만 갈수록 말이 거칠어지는 추세이다. 험악한 말도 아무 생각 없이 해 버리기가 일쑤여서 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악하고 혼탁한 쪽으로 끌려가고 있다. 우리 사회에 오고가는 말의 거침과 소란함, 입으로는 소통하자면서 마음으로는 소통을 거부하는 불통의 말이 범람하고 있다. 특히 정치인의 말은 신빙성이 없어 염증을 일으키게 하는 경우도 많다.

‘내 생각, 우리의 생각만 옳다’는 교만이 상대로 하여금 동떨어진 판단과 행동을 하도록 유도한다. 무엇보다 말로써 교만한 자들은 교만의 결과에 대해서는 절대 책임지지 않는다. 일을 저질러놓고 여의치 않으면 장막 뒤에 숨어버리는 비겁한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은 살면서 겪는 저마다의 고민이 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앞이 캄캄하고 문제가 너무 크게 보여 죽을 것처럼 힘들고 감당할 길이 없어 보이는 멘붕도 자주 겪곤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당시를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모든 멘탈을 치료하게 된다.

내 가족이 죽고 사는 문제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큰 문제라고 할 수도 없다.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면 꿈꾸듯, 신기한 듯, 처음 본 듯, 놀라운 듯, 아름다운 무엇을 보는 듯…. 잔잔한 느낌을 받는다. 왜 이런 느낌을 우리는 실생활에서 잊어 버렸을까.

말은 상대의 마음을 살 수도 있지만 말 한마디로 상대와 평생 갈라 설수도 있다. 그래서 말은 곧 그 사람이다. 그 인격과 품격을 결정하고 말로써 그 사람을 가늠해 볼 수도 있다.

하루 종일 나는 말로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평가 받았을지 싶다. 따뜻한 말, 향기나는 말로 갑자기 떠나갈 나를 준비하는 이별연습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덩달아 사회도 따뜻해 질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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