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란 이름으로 살아오신 아버지
8년전 5월 어느날 아침 출근전에 다급한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향하던 그때를 문득 떠올려 본다.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하니 차를 타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제발 무사하시기만을 기도했고 설마하니 그렇게까지 다치시진 않았겠지 하면서 숨을 몰아 쉬었던 기억 말이다.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로 큰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그 길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불귀의 몸이 되고 마신 아버지!
이게 이승에서 자식과의 마지막 이별이 되고 말았다.
세상에 준비 안된 이별이야 무수히 많았겠지만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칠거라곤 상상조차 못한 나는 내 자신이 스스로 정지된 상태였다.

75세의 일기를 살아 오시면서 그야말로 대쪽이셨고 원칙이 아니시면 타협조차도 안하시던 완고 그 자체이셨던 아버지이셨다. 12세에 당신의 아버지를 여의시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아들 하나라고 제법 큰 도시에서 중학교를 다니셨고, 당시에 흔치 않던 병역의 의무도 필하셨다.
할머님의 말씀에 의하면 외아들 군대 안 보내실려고 별 애를 다 쓰셨다는 얘기도 들었었다.
당신 나이 21살에 19세의 어머니를 만나 가정을 꾸리시고 5남매의 자식을 두셨으니 조상님들께 체면은 치르셨던 걸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많이 배우지도 못하시고 그렇다고 남보다 더 많은 토지를 물려 받으신 것도 아니었지만 자식들 가르치고 기르시느라 한눈 팔 겨를 없이 농촌이면 누구나 겪는 고통과 곤란, 그리고 어려움을 두배도 아닌 서너배정도를 겪어 오신 분이시다.

말수가 전혀 없으시고 자신의 앞만 보시면서 때로는 외로울 정도로 고독한 삶을 살아오셨던 분이셨다. 농한기가 되면 홀로 바둑을 두시고 고서를 넘기시며 특히 한학관련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던 분이셨다. 일가와 문중관련 일에 늘 앞장이셨고 조상을 섬기는 일 그리고 향교를 출입 하시면서 유림들을 대표하는 유도회장을 역임하시기도 했다.
어린 손주들을 불러 놓으시고 윗사람을 공경해야하는 이유와 기제사에 유의해야 할 여러 가지들 말씀들로 수시로 가르치심에 적극적이셨다. 지나고 나니 그게 다 머리가 굵어진 아들 며느리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었던 같다.
이렇듯 저희 아버님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교육은 애틋했다. 당신 살아 생전에 그 뜻을 헤아리면서 조금이라도 부응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좀더 기울였다면 돌아가신 후에라도 덜 서운했을 것인데 어쩔 수 없지만 너무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부모 살아 생전에 지극정성을 다하라는 어르신들의 말씀이 있으셨던 것 같다.

삶의 힘듦이 아버지로 불리울 때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어렵고 힘들 때 자신도 모르게 아이고 아버지 하면서 한숨을 돌린다. 이상하게도 왜 하필이면 생전에는 어렵고 가까이 하기가 쉽지 않았던 아버지를 그리도 쉽게 찾게 되는 것일까? 훨씬 편하게 대해 주셨던 어머니를 찾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텐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아버지라는 말은 통칭적으로 쓰여지는 경우에서 일수도 있겠고, 한편으로는 자식으로서 힘들 때 기대고 싶은 욕심이 자애하신 어머니 보다는 더 강해서 그랬을 것이다. 더 큰 이유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존경하는 분이셨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 내 아버지는 남들 보다 딱히 잘나신 분도 아니시다. 그렇다고 공직을 담당하신 경험도 없으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름 석자도 잘 알려지신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대중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실 만한 이유가 없으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자식의 가슴에는 말로 형언 할 수 없는 한 없는 감사와 존경과 사랑이 크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어느 정도 잊혀져 가지만 문득 문득 생각날 때 마다 그리고 제삿날이나 명절 때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부끄럽지 않은 아니 당신의 작은 이름 석자에 누를 끼치지 않는 삶을 살아가려고 작은 동네에서라도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아버지의 평가가 달라지는 이유
지금까진 17년이라는 세월 속에 수차례의 선거를 통해 주민들의 심판을 받아왔다. 우리나라 선거는 한번 입후보하면 이웃사촌은 물론 동네팔촌까지 완전히 까발려 진다는 특징이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돌아가신 조상님들에 대한 평가까지 받아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형식에 구애 받지 않을 뿐 오늘날 높은 양반들 청문회 보다는 훨씬 힘든 과정을 겪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거 때마다 자신에 대한 평가에는 갖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누구도 유권자들의 입방에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본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것들은 저의 조상님들이나 선친 그리고 어머님을 비롯한 형제들의 강직하시고 정의로우시며 특히 선하게 살아오신 결과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남못할 일 안하고 살아 오신 것이다. 그래서 선거 때나 지금도 저는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크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분들의 절제된 언행 속에 겪으셨을 불편을 생각하니 죄송스럽기 짝이 없다. 이 기회를 통해서 제 아내를 비롯한 가족은 물론 주위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이게 다 한 집안을 이끌어 오시고 가장이셨던 제 아버지의 참 아름다운 삶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한번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다
그렇게 그렇게 살아 오시다가 예기치 않은 삶을 정리하신 저의 아버님은 예나 지금이나 당신 삶의 궤적에 하등 다른 평가가 이뤄지는 법은 없다. 오히려 세월에 묻혀 다소 잊어져 가는 것이 길어짐에 순간순간 아쉬움이 더 커질 뿐 달라지는 것은 딱히 없다는 것이다. 물론 특별한 인생이 아니셨기 때문에 그랬다고도 볼 수도 있다.

당신이 돌아가셨을 때 조의금을 받지 않았던 사례와 고을의 어른은 한사람 뿐이시다면서 자식의 취임식장에 끝내 나타나지 않으셨던 일화들이 이제야 제대로 평가를 받는 것 같다. 그래서 달리 평가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고 그러도록 자식들이나 후손들 그리고 주위 분들에게 수고를 끼치는 마음에 없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저희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이심에 부끄럼이 없다.

사자의 지나친 평가도 명예훼손이다
2013년 계사년에 우리나라에는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고 지금도 깜짝 깜짝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새정부가 들어서다 보니 의당 바뀌고 변화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잘못된 구습을 바로잡고 시대착오적인 발상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며 부족한 것을 메우기 위한 노력들 그리고 고쳐 쓰고 새로 만들기 위한 모든 일련의 행위들은 필요할지라도 국민의 눈높이와 상식선에서 추진되고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런 것들을 오버하거나 역이용하려거나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바로 국민경각심이 발동하게 되는 동기를 부여케 하기 때문이다.

자식의 신분에 변화가 왔다고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새로워지고 포장과 각색되어야 한다는 것은 국민감정과 역사인식에 참으로 위험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일들을 꾸며내는 사람들의 인격도 한심 하려니와 더 큰 것을 잃는 것은 국제적인 망신 바로 국격의 훼손에서 오는 평가를 두렵거나 무서워 하지 않는 무지라는 것이다.
살아있는 분이나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도 아닐 성 싶어 감히 드리는 말씀이다.

그분은 저의 아버지처럼 조용한 삶을 마치신 분이 아니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몇 정권을 거치면서 바뀔 수 없는 냉정한 평가를 이미 국민의 이름으로 받으신 분 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냥 편히 놔두시는 것이 훨씬 더 좋을성 싶어 드리는 말씀이오니 한발 물러서 숙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역사의식을 망각한 체 행한 당신들의 아름다운 미사여구 일지라도 결코 사자의 명예를 훼손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3년 12월 27일 아버님 태어나신 83주기에 부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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