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남면 하묘1리 두곡 마을


荷苗里는 운남면소재지에서 망운면 방면으로 1㎞ 가량 떨어져 있으며 마을의 모습이 연꽃을 닮았다 하여 하묘리라 했다. 조선시대에는 영광군 망운면 소속이었다. 이후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두곡리 팔학동리 도림동 둔전동 금산을 병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1983년 운남면으로 분리되면서 두곡 둔전 팔학 원하묘 신촌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두곡 마을 입구와 배나무정 등 하묘리 능선의 전체에 여러 기의 고인돌이 있으며 둔전 마을에 김해김씨 제각인 경헌재가 있다. 한국전쟁을 앞두고 운남과 망운은 커다란 갈등과 변화를 겪었는데 특히 두곡 마을을 포함한 하묘리 일대에서는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운남으로 들어오는 첫머리 마을

頭谷은 하묘1리에 속하는 마을로 두곡과 샘건너, 꽃회사 마을로 이루어졌다. 두곡이란 마을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운남과 망운의 경계 지점으로 망운에서 운남으로 들어오는 첫머리에 마을이 있다 해서 머리실[頭谷]이라 붙인 이름이다. 두 번째는 마을의 지형이 소의 머리에 해당된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마을에는 지금도 동각골, 兩角洞 등 소의 뿔과 관련된 지명이 있으며 옆 마을인 둔전은 풍수지리로 봤을 때 와우정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소와 관련이 깊은 마을들이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주민들의 증언이나 마을유래지의 기록에 의하면 밀양 박씨 박화진(朴華鎭. 자-사여, 호-죽헌. 1777-1852)과 그의 동생 윤진(允鎭. 자-사일, 호-춘성. 1786-1848)이라 한다.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박화진은 원래 경기도 고양에서 정변으로 인해 안성으로 유배당했다가 후일 다시 전남으로 유배된 뒤 말년에 이곳으로 와 터를 닦고 후손이 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밀양박씨 청제공파의 가승보를 보면 박화진은 贈 사복시정(司僕寺正)이라 기록되어 있다. 사복시는 말이나 수레를 관리하던 관아인데 그곳의 시정이라면 정3품관을 말한다. 조선시대 이 마을이 목장면에 속했기 때문에 사복시정과의 연관성을 추정해보나 벼슬이 사후에 내려진 贈이어서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또한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다. 기록이나 주민들의 말대로라면 1800년대 초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소린데 이미 1789년에 나온 호구총수에는 두곡이란 마을 이름이 나온다. 이런 사실로 봤을 때 박씨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것인데 주민들의 말이나 기록으로는 알 수가 없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양각동으로 불렸던 곳에 육종연구소인 꽃회사(flower company)를 설립하여 꽃씨를 채취했던 곳을 지금도 꽃회사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꽃회사가 설치되었던 자리는 개미허리처럼 잘록한 부분으로 등성이께로 난 도로에 서서 보면 양쪽 바다가 한눈에 들어 올 정도로 육지의 폭이 좁은 곳이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꽃을 채종하기에는 최적지라고 한다.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재배했던 꽃은 다년생 화초로서 금계국으로 부르기도 하고 천일국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제는 무안 지역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특히 꽃회사 마을 아래에는 황금어장인 청계만이 연결되어 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커다란 포구가 형성되었다. 이 포구는 70년대까지만 해도 운남 지역에서 생산되는 고구마를 비롯한 상당부분의 화물을 실어 나르는 곳이었다.

▲배나무정의 아픔

이 마을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져왔던 한국전쟁 때 운남 운북의 지역 간 갈등을 안고 있는 마을이다. 이른바 운남과 운북의 경계점에 있는 배나무정이 그것이다. 오래전 배나무정은 초분골이었다. 특히 총각 처녀의 영혼들이 있을 때는 영혼결혼을 시켜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운남은 지리적으로 외진 곳에 있다 보니 주민들이 망운지역에 비해 상대적인 소외감을 많이 느꼈던 지역이다 그러한 소외감이 극적으로 표출된 것이 한국전쟁 때이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들어 와 70여 일간 운남을 점령했었다. 그때 운남 사람들은 운북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승리감을 맛보았다고 한다. 그 후 인민군이 물러가고 군경에 의해서 운남 지역을 수복하려 할 때 운남 사람들은 격렬히 거부하고 저항하였다.

이러한 저항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 이른바 배나무정 싸움이다. 운남 사람들은 10대에서 50대까지 누구도 가릴 것 없이 죽창을 들고 이 배나무정으로 운남을 지키러 나온 것이다. 그리고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싸웠다. 군경과 운북 사람들은 기관총과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아픔을 갖고 있는 지역이기에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곳을 지날 때는 운남이나 운북 사람들 모두 그곳에 나무나 꽃을 꺾어서 올려놓아 혼백들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주민들은 지금도 그곳을 지날 때면 머리털이 쭈뼛해진다고 한다.

마을 옆을 지나고 있는 압해-운남간 도로공사에서 전남문화재 연구원이 두곡 마을 구간을 지표 조사했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청동기 시대의 지석묘와 석곽묘가 나왔으며 삼국시대의 고분 토광묘 옹관묘 등을 발굴하였다. 이런 자료들을 모아 두곡마을 고인돌군이라 해서 길 옆에 부지를 마련하여 전시하고 있다.

또한 마을 입구 바윗등이라 부르는 곳에 3기의 지석묘가 있었다. 주민들은 예전에 바윗등의 바위 위에서 이 지역의 처녀 총각들이 데이트를 즐겼던 곳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7년에 소유주가 묘지 공사를 하면서 고인돌들을 전부 가져가 버렸다고 한다.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300미터 정도 떨어진 바다와 인접한 곳에 백자를 구웠던 도요지가 있다. 마을에서는 점등이라 부르는 곳인데 서쪽에서 보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형성되어 있고 반대편인 동쪽 구릉은 완만하다. 밭으로 개간되면서 요지가 파괴된 듯하며 현재 경작 중인 밭에는 요벽편과 도지미 백자편 등이 산재해 있다.

목포대학교 박물관의 기록에 의하면 ‘마을 입구 도로변의 나지막한 구릉일대에 위치한 유물산포지가 있다. 유물은 회청색경질토기편과 옹관편이 수습되었다’고 하는데 확인할 수가 없었다.

마을 입구에 열부김해김씨기적비가 있으며 남아있는 지명으로 동각골, 점등, 신토성, 가능골, 양각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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