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창석의 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송현리는 청계면소재지에서 무안 쪽으로 3㎞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송치, 대성동 두 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성동 마을을 가르며 광주-목포 간 국도 1호선이 지나고 있다.

지명이 호구총수에는 일서면 松峙 長松亭으로 나오고 1912년엔 일서면 松峴리 大星洞으로 나온다. 또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북산리, 농소촌, 호산동, 연화촌, 송정, 대성동을 병합하여 다시 무안군 청계면에 편입되었다. 예전에 솔치는 반촌 대성동은 민촌이라 불렸으나 현재는 모두 잘 살고 있다. 솔치에 달성배씨 제각인 추원재가 있으며 대성동에 나주정씨 제각인 장송재가 있다.

▲ 청계 대성동 마을 전경

▲원래의 이름은 장송정이다.

▲ 장송재
대성동은 송현2리에 속하는 마을로 일제강점기 때 대성실행조합이라는 농촌진흥조합이 있었는데 이 단체의 이름을 따 붙인 지명이다. 처음엔 大星洞이었다가 현재의 大成洞으로 바뀌었는데 크게 이룰 수 있는 마을이란 의미를 지녔다. 조선시대까지는 장송정이었다. 송현리라는 지명 자체가 소나무가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 마을도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어서 얻어진 이름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나주 정씨 정영효(자-성미, 호-의암. 1530-1575)이다. 공은 솔갯재 너머 태봉에서 이 마을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공은 천성이 강직하고 학문에 크게 뜻을 두었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첨정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성씨자료에는 정대흥으로 나왔으나 주민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마을에는 정씨 외에도 진주강씨 김해김씨 기계유씨 장수황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진주강씨 입향조는 姜啓恭(호-추담)으로 수은 강항의 5세손이다. 영광 불갑면 운제에서 세거하다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마을에 들어왔다. 공은 학문이 높았으나 영리를 탐하지 아니 하였다. 김해김씨 입향조는 김석권(자-국서, 호-장곡. 1837-1916)이다. 공은 현경면 오류리 곡지동에서 세거하였으나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주한 것이다.

이 마을은 대성동 연화촌 호산 상동 용수촌 옥동골 웃버든 북산 솔갯재 새태 등 10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마을회관이 있는 마을은 웃버든에 해당되고 오른쪽에 대성동이 대성동 앞에는 새태가 있다. 웃버든 앞 길 건너에는 연화촌이 연화촌 옆에는 옥동골이 주유소 건너편에는 북산이 있고 대성저수지 밑에 상동이 있다.

이중 용수촌은 한때 100여 호가 살 정도로 주민들이 많이 있었으나 오래 전 불이 나면서 폐촌이 되다시피 했다. 또한 두 그루의 거대한 당산나무가 있어 주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기도 했으나 60여 년 전에 불이 나 현재는 한그루만 남아있다. 마을에 중샘도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이 마을은 청계면에서 최고의 번화가였다. 북산에 진흥조합이 있어 당시 청계면 경제의 중심지였으며 마을에는 드물게 목욕탕 회관 베틀기계 정미소 등이 있었다. 광복이 되자 조합이 보유하고 있던 많은 토지들이 몇몇 유력자들에 의해 분할되면서 공동의 소유가 아닌 개인소유가 되어 버렸다.

▲장송장이란 시장이 있어

조선시대에도 이 마을은 번화가의 중심지로 市場이 있었다. 남녘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었고 뱃길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다. 해서 주막도 여러 개가 있었다고 한다. 면성지에 보면‘고을 남쪽 20리 일서면에 장송장이 있었는데 이제는 폐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주민들은 오래 전의 일이라 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 수 없지만 송현리와 상마리 경계 즉 청계초등학교 주변을 장등이라 부른다고 한다.

마을에는 2008년에 착공한 청계 제2농공단지가 있다. 드물게도 이 마을은 한국전쟁 때 피해가 없었다. 마을이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좌우익의 인사가 활동하기 좋은 위치여서 많은 피해가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주민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마을 뒤에 있는 대성저수지 위를 큰고랑이라 하는데 이곳에서 옹기나 도자기를 구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현재도 주변에서 옹기나 도자기를 구울 때 나오는 슬러지가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하얀 점토가 나오기도 한다. 이 저수지는 1945년에 준공되었다.

마을의 주산이 龍池峰이다. 한국지명총람에는 봉화대가 있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었다. 용지봉 뒤는 기우제를 지냈던 무재봉으로 바로 승달산으로 연결된다.

호산 마을 뒤에 불당골이 있다. 불당골에는 절이 있었던 흔적이 있으며 그곳에 송감사의 묘가 있었다. 송감사에 대해서는 기록이나 증거가 없다. 하지만 주민들은 송감사가 주변에 살면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송감사가 살았다는 죽림지역에는 지금도 밭을 갈 때 쟁기 날을 버릴 정도로 많은 기왓 조각을 발견할 수 있다. 또 불당골로 불리는 곳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송감사의 묘라는 큰 봉분이 있었는데 그 묘 앞에 서 있었던 석인 두 기는 예비군 훈련 때 예비군들에 의해서 현재 청계중학교에 옮겨져 있다.

솔치 마을 앞 도장골 뒤에 있는 산을 깃대봉이라 하는데 옥녀봉이라고도 한다. 그곳은 예전부터 명당이 있다고 전해지는 곳인데 마치 옥녀가 연주를 하며 즐기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옥녀봉 아래는 거문고라 하고 그 옆에는 방구(북)봉, 젓대(피리)봉 등의 지명을 가진 봉우리가 있다. 이곳에서 나오는 약수가 유명해 많은 사람들이 물을 퍼가기도 했다. 옥녀봉 정상에는 나주김씨 묘가 있다.

마을 뒤 석산개발로 주민들의 피해가 극심하다. 석산개발은 1990년대에 시작하여 20년이 넘은 기간 동안 진행되고 있다. 찌는 듯한 더위에도 문을 열 수가 없고 빨래를 널 수가 없다고 한다. 또한 좁은 마을길에 대형차가 하루에도 수백 대씩 다니고 있어 불안함은 말할 수 없고 가옥이 흔들려 안전에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더욱이 요즈음처럼 비가 오지 않는 날씨에는 차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가 날려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다. 

마을에 있는 전원교회는 대성교회의 전신이다. 이 교회는 청계에서 복길 교회 다음을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뒷골에 나주정씨 제각인 장송재가 있다. 1976년에 준공된 이 제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현판이 5개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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