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계두마을 전경

龍浦里는 삼향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2㎞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일로의 당항촌과 용포리를 잇는 간척사업으로 마을 앞엔 넓은 농경지가 펼쳐있다. 그 사이로 흐르고 있는 남창천이 일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811번 지방도로와 호남선 철도가 지나고 있다.

용포리는 본래 나주군 삼향면의 지역으로서 오룡산 밑에 포구가 형성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고종32년(1895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고 1910년에는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후정리, 용계리, 평전리, 덕치리, 추치리, 신동리, 와동리와 장항리 극배동, 이동, 용강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용포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후정, 용계, 용포, 덕치, 이동, 계두, 와동 등 7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닭머리의 마을

계두는 용포6리에 속하는 마을로 원래는 용포2리인 용계 마을과 한 마을이었으나 인구 증가로 1992년에 分里 되었다. 이 마을은 국사봉에서 학림산과 관임산을 거쳐 장항포 들을 향해 돌출되어 나온 반도형 마을로 1914년 호남선 철도가 마을을 가로지르며 지나가 섬 형태로 보이기도 하는 마을이다. 처음에는 배들이 정착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뗏머리라 불렀으나 마을의 지형이 닭머리를 닮았다 하여 鷄頭(자료에는 溪頭라고 기록했으나 틀린 표기이다)라 부른다. 

한때 같은 행정구역이었던 용계마을의 지명유래도‘마을의 뒷산에 있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앵계’라 불렸으나 그 후 한자로 고치면서‘龍溪’로 변했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앵계’는 전라도 사투리로‘알을 품은 어미닭’을 뜻한다고 한다. 마을이 닭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면에서 이 마을과 닮은 점이 있다.
기록으로 보면 마을 앞에 넓은 농경지를 만들어 준 장항포 둑은 19세기 말에 시작하여 1903년에 완성되었으며 장항포 들 주변의 인구 변화를 보면 1900년을 전후해서 눈에 띄게 늘어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즉 둑막이 공사를 비롯해서 농경지 경작을 위해 인구의 유입이 늘어난 것이다.

이 마을도 맥포에서 살던 함평이씨 후손이 120여년 전에 이 마을로 내려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입향조를 알 수 있는 함평이씨 족보를 볼 수 없어 확인할 수 없었지만 주민들 모두가 함평이씨가 먼저 들어왔다는 데는 이의가 없었다. 마을유래지 기록에는‘1880년 경 함풍이씨 이환제가 나주에서 영산강 하류를 따라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장항포 농장을 위주로 농사를 지어 부강한 마을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바로 뒤이어 들어온 성씨가 해주오씨다. 해주오씨 입향조는 오춘혁(자-운석, 1866- ?)으로 남악에서 살다 일로읍 용산리 인동 마을을 거쳐 이 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문헌을 통해서 본 마을의 역사도 호구총수나 1912년 1917년의 자료에는 지명이 나오지 않는다. 1987년에 가서야 용포2리로 나온다.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마을

마을 뒤 철로가 지나던 길은 목포에서 일로로 이어지는 4차선 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마을 옆으로는 광양까지 이어지는 L자형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맥포리와 용포리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였던 공동묘지가 있고 마을 중앙의 뒷산에는 과수원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곳곳에 축사도 있으나 대체로 가옥들이 장항포 들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마을 앞으로 죽림제와 감돈제에서 내려오는 농업용수가 지나는 수로가 있었으나 현재는 복개하여 길로 사용하고 있다.

▲장항포 들 전경

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 장항포 들은 일제강점기 때 식미지 수탈기구였던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 中山三郞과 中山英南 등 나까야마 형제가 양분하여 소유했던 농장이었다. 나까야마는 현재 일로동초등학교가 있는 곳에 집을 짓고 농장을 관리하였다. 주민들은 장항포 간척지의 간수가 빠지기까지는 쪽박타작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해서 일제강점기에는 먹을 것이 신통치 않아 주민들이 많은 고통을 겪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짚을 이용한 제품을 만들어 연명하였는데 가마니 짜기는 기본이고 새끼와 마람 등을 엮어 목포까지 지고 가서 팔았다. 또한 영산강 둑이 막히기 전까지는 바다에서 짱뚱어 게 맛 등을 잡아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삼향읍에서도 부자 마을로 자리 잡았으며 곡물출하량도 삼향에서 두 번째로 많다. 농지가 많아 농기계도 마을 단위로는 제일 많이 있다. 주 소득원이 벼농사이다 보니 밭곡식이 없다. 해서 이 마을은 논두렁농사가 많이 있다. 논두렁을 이용한 콩이나 깨를 심어 상당한 소득을 올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마을 앞 농장을 향해 많은 길이 나있지만 예전에는 811번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계두길 한 곳뿐이었다. 마을에 들어왔다 나가는 길도 이 길이었다. 또한 이 길을 이용해 죽림이나 이동 마을 사람들이 장항포 농사를 짓기 위해 다니는 길이기도 하였다. 길이 좁아서 다니기에 불편해 마을길이면서도 이동 마을사람들과 함께 길을 확대 포장하기도 했다.

당시 이동 마을과 이 마을에서는 하루 8번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즉 이동마을 일꾼이 이 길을 이용하여 농장까지 8번 정도 왔다갔다 하면 하루해가 저문다는 것이다. 해서 8번 이상을 다녔다 하면 주인이 돈을 더 주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철둑너머 샘이라 부르는 샘이 하나 있었다. 지금도 상수원 시설이 되지 않아 지하수를 사용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이 샘 하나로 주민들이 식수를 해결했다. 물이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이 물을 이용해 주조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때 이 마을은 피해가 없었다. 주민들 스스로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마을이라 자랑할 정도로 주민 서로간의 불신이 없다. 마을 뒤에는 7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삼향교회가 있으며 대부분의 주민들이 이 교회에 다니고 있다.

저작권자 © 무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