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맥포리는 삼향면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5㎞ 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다. 남으로는 전봉산이 북으로는 국사봉이 있으며 811번 지방도로가 극배와 월계 마을 사이를 지나고 있다. 또한 서해안 고속도로가 맥포리를 가르며 지나가고 있다.

본래 나주목 삼향면의 지역으로 맥포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6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무안군에 편입됐다.

 이후 1910년에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월계동, 송산, 홍학동, 송정, 백학동, 죽림동, 상동, 후동 및 이동, 극배동의 각 일부와 이로면의 백학동 일부를 병합하여 맥포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됐다.

현재는 극배, 월계, 맥포, 송산, 죽림 등 5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죽림에 강화노씨충신문이 있으며 송산에 고인돌 8기가 있다.

충신문이 있는 강화노씨 집성촌

죽림은 맥포5리에 속하는 마을로 학림과 죽림으로 이루어졌으며 강화노씨 집성촌이다.

옛날에는 마을의 모습이 날아가는 鶴의 머리 부분에 해당한다 하여‘새머리’라 불렀다.

조선시대 중기 나주 죽촌에서 살던 강화 노씨들이 임진왜란을 피해 이곳으로 와서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노씨들이 왜적과 싸워 공을 세우면서 그들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현재의 이름인‘竹林’으로 바뀌었다.

문헌을 통해서 마을의 역사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 나주목 삼향면 죽림촌으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엔 무안군 삼향면 죽림동으로 1917년엔 삼향면 맥포리 죽림동으로, 1987년엔 삼향면 맥포리 죽림으로 기록되었다.

입향조는 강화 노씨 노추소(자-수만, 1594-1684)이다. 공은 임진왜란 공신 노춘근(魯春根. 자-화보. 호-二憂堂, 1564-1594)의 유복자 아들이다.

 입향조인 수만공에 대한 기록은 적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많이 있다.

 아버지인 이우당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무예가 출중하였다.

22세 되던 해에 무과에 급제하고 수문장이 되었는데 늘 칼에 貞忠報國이란 네 글자를 새겨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임란을 당하자 집에서 거느리고 있던 수십 명의 장졸들을 이끌고 충무공 막하에 들어갔다. 공은 충절공 정운과 함께 한산도와 당포 싸움에 선봉으로 나아가 큰 공을 세웠다.

고하도 전투에서도 크게 싸워 이겼으나 워낙 적의 수가 많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군량은 떨어지고 무기도 없어져 군졸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자 공이 분연히 나서 왜군 속으로 들어가 왜병을 무찌르고 마침 지휘하고 있던 왜장을 품에 안고 물 속으로 들어가 전사를 했다.

이때 공이 남기고 간 詩가‘남아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내 손에 쥐어진 삼척검만이 알 것이다(男兒殉國志 三尺劍所知)’라는 시다. 

임란이 끝나자 후손들이 혼백을 추슬러 오룡산 기슭인 해창에서 초혼장(招魂葬, 전쟁이나 선박사고 등 시체를 거둘 수 없는 이유로 운명하였을 때 지내는 장례의식)을 지내고 후에 이 마을로 옮겼다.

조정에서는 그를 원훈에 기록하고 정려를 내렸으며 병조참판에 추서했다. 마을에서는 남산등 아래에 강화노씨충신문을 세워 그의 충절을 기렸다.

또한 2011년에는 주민들이 삼문 입구에 정충보국정려각을 세워 조상의 충절을 다시금 새겼다. 충신문 안에는 5개의 현판과 삼문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다.

삼문 문설주에는 사람 모습이 조각되어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연꽃이 개화하는 형국의 마을

이 마을은 죽림이라는 이름처럼 대나무가 많다.

 특히 학림 주위에는 아직도 많은 대나무가 남아 있는데 나씨들이 죽촌에서 이곳으로 들어올 때 현재의 죽림 마을이 아닌 학림으로 들어오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왜냐하면 지금은 학림이 묵전으로 변해있지만 얼마 전까지는 모두 집터여서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마을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전에는 좋은 터였음을 알 수 있다.

승달산의 맥을 이은 국사봉이 남으로 내려오면서 학림산을 만들고 이어 조두산에서 잠시 멈춘다.

마을의 주산은 새머리산으로 일컫는 조두산이다.

 조두산을 사이에 두고 남산등과 청룡등으로 나뉘어지는데 마을은 그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길 건너에 관임산이 있다.

관임산에서 이 마을을 바라보면 마치 연꽃이 개화하는 형국을 지니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영암을 거쳐 광양으로 가는 나들목이 새로 조성되었다.

마을 앞길은 한길이라 해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큰길이었다.

목포를 비롯한 삼향 청계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한양을 갈 때나 함평 등 북쪽으로 갈 때에 거쳐야 하는 길이다.

해서 역사적 변동기에는 사건들도 많았다.

 특히 동학혁명이 끝나갈 즈음 한길을 이용해 동학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할 위기에 처해있을 때 이 마을 사람들이 적극 나서 참여자들을 옹호하고 감싸주어 死地에서 구해내기도 했다.

특히 이 마을에는 대양리의 동학 접주(배상옥장군)가 타고 다녔다는 준마가 있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하루 아침에 해제를 간다는 말[馬]’이다. 이런 사실 등으로 미루어 이 마을이 동학에 깊숙이 관련된 것으로 보이나 더 이상의 확인은 할 수 없었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갱생 마을이었다.

이른바 모범마을이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배운 사람들이 많아 官이나 주변마을에서 함부로 상대하기 어려운 마을이기도 하였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몇 채의 집은 고개를 들고 봐야 처마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규모 있는 집들이 많았다고 한다.

현재의 마을회관 자리 부근에 일제 강점기 때 세운 조그마한 방직공장이 두 군데 있었다. 마을 주변에 뽕나무밭이 많아 잠업 마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죽림재라는 큰 서당이 있었다.

이 서당에는 큰 선생님이 있어서 주변 마을에서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목포의 차남진씨도 이 마을에서 공부를 하였다.

또한 望美亭이라는 2층 구조의 정자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하였다.

마을에는 세 개의 샘이 있었다.

 마을 가운데 있는 큰샘은 청석으로 쌓아올린 샘인데 물맛이 좋은 샘으로 알려져 있어 정월보름만 되면 주민들이 물을 지키기 위해서 밤을 새웠던 샘이기도 하다.

길가에는 청룡샘이 있었는데 청룡등 아래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샘은 주로 빨래를 하였던 샘이다. 갈미샘도 있었다.

주민들은 순후한 인심을 가지고 있어 큰 소리가 담 밖을 넘어가지 않았다.

 또한 단결심이 좋아 나라의 변란기에도 주민들의 피해는 없었다.

마을 뒤편에는 학림사의 절터가 있다.

우리 지역의 문헌인‘면성지’에도‘鶴林寺 三鄕國師鶴林峰在 今廢’라고 짤막하게 적혀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학림사는 백제 시대에 세워진 古刹이었으나 조선 중기에 중들을 병력으로 보충시키기 위하여 실시한 사찰 소각령이 전라도에도 내려지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학림사에는 4-5개의 암자가 딸려 있었다. 지금도 골짜기마다에 암자 터가 남아있다.

학림사 뒤에는 굴이 있었는데 돌로 잘 다듬어진 굴이었다 한다.

잡풀이 우거지고 세월이 흘러 찾지는 못했으나 주민들이 어렸을 때 드나들었던 굴로 상당히 긴 굴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만석군 터가 있어

현재 이 절 터 부근에는 보해양조 창업주 임광행씨가 세운 학림재가 있다.

학림재는 1999년에 세웠으며 덕천임광행회장숭모비를 거쳐 덕천산방 삼문을 지나면 제각이 나온다.

정면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안에는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제각의 주변에는 대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오른편 산으로 올라가면 나주 임씨의 묘가 있는‘만석군 터’라는 명당이 있다.

탁 트인 전경에 좌청룡 우백호의 기상이 살아 있어 누가 봐도 좋은 터임을 알 수 있다.

이 마을에는 예부터 무덤에 비석 등 석물을 하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왜냐하면 풍수 지리상 마을의 형국이 새 형국이어서 비석을 세우면 새가 날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해서 마을 사람들이 쓴 묘에는 지금까지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또한 학림사 주변에는 묘지공화국이라 불려도 좋을 만큼 수백 기가 넘는 묘지들이 있는데 이들의 묘에도 대부분 석물이 없다.

 그러나 차츰 외지인들이 이 마을 주변에 묘를 쓰면서 비석 등 석물을 해 자연의 이치에 맞춰 살아가려는 이 마을 사람들의 뜻이 잊혀져 가고 있다.

마을에는 학림제와 죽림제라는 두 개의 저수지가 있다.

죽림제를 지나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를 개종태라 했다.

또한 사행곡(뱀길-새앙골), 금부등(공동묘지) 와등(옛등) 웃새머리 금적골(정저골) 대추나무골 유와골 도적골 꾀꼬리재 가슴박골 감장골 고작골 뒷골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학림산의 바위나 돌에는 지금도 굴 껍질이 붙어 있어 아주 오랜 옛날에는 이곳에도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았는가 추정해본다.

마을에서 송산마을로 넘어가는 속칭‘독배기’라 부르는 곳의 인동장씨 묘 주변에는 8기의 고인돌이 있어 오래 전부터 이곳에 유래가 있는 마을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목포대학교 박물관의 조사에 의하면 13기의 지석묘가 있었다고 하나 더 찾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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