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르포>무안갯벌의 열 두 달‘갯것들’-(20)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김경완 연구원: 생태·문화자원을 찾아서

본지는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과 공동으로‘무안갯벌의 열 두달’이란 주제로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김경완 연구원의 무안지역 연안에서 생산되는 수산물에 대해 현장 취재를 격주간으로 20여회에 거쳐 연재한다.

<편집자주>

무안군은 동으로 영산강, 서로는 드넓은 서해안 갯벌을 안고 있으면서 깊은 만을 보유해 간척이 용이한 지역이 많았다. 갯벌을 막아 육지로 만드는 간척은 한말과 일제강점기에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영산강변의 깊은 만인 장항포간척지(삼향읍 용포리와 일로읍 죽산리를 막음)와 영화농장(일로읍 돈도리와 양두를 막음)이 대표적인 곳이다. 이곳은 모두 농경지로 이용되어 대량의 쌀이 생산되었지만, 대부분 일제에 의해 수탈되었다.

▲1920년대 장항포 제방

서해안에 인접한 무안 서쪽의 대표적인 간척지는 망운의 창포, 해제의 산길, 운남의 구일, 청계의 복길간척지가 있다. 이중 가장 큰 면적의 간척지는 창포간척지로 방조제 길이 1,270m로 해제 산길간척지(방조제길이 1,518m, 면적 1,355㏊)보다 짧지만 간척면적은 1,544㏊로 더 넓다.

한정된 지면탓에 이 글에서는 창포호와 관련된 이야기만 서술하겠다.

창포간척이 시작된 것은 1963년이다. 김안종과 지역유지 24명은‘창포농지개척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매립면허를 취득하였다. 당시 제출된 사업계획서에 의하면 이 간척사업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복귀불능 난민과 일반 영세난민 등 난민정착을 위한 난민자조사업으로 시작되었다.

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간척공사 초기에는 난민들이 작업에 종사하였으나, 그들이 떠난 뒤에는 지역 주민들이 공사에 종사했다고 한다. 이들은 당시‘밀가루사업’이라는 외국원조양곡지원사업(PL480)의 지원을 받아 노동력을 지원하고 인건비 대신 밀가루를 받았다.

그러나 1978년 재정이 어려워진 김안종으로 부터 우진건설 측에 사업권이 인계되었고, 1981년 10월에는 다시 남화토건(대표 최상옥)측으로 사업권이 이전되었다. 결국 창포간척지조성 사업은 최상옥에 의해 1983년 3월 준공되었다.

방조제가 만들어지기 전 창포만은 어패류의 대규모 생산지였다. 당시 그 지역에는‘창포석화계’,‘피서리포패조합’등이 구성되어 활발한 어업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굴과 고막, 각종 어류들을 채취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간척지가 조성된 이후 어민들은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갯벌을 빼앗겼다. 뿐만 아니라 최초사업자에게 약속받은 농지불하도 받지 못했다. 심지어 면허지구 내 기존에 조성되었던 소규모 무면허매립지도 간척사업자가 흡수해 버려 소유권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간척을 통해 주민들이 잘 살아보겠다는 꿈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개인사업자만 그 모든 부를 독차지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일은 공유수면매립법에 의해 보장되었다. 이미 1923년에 제정된「조선공유수면매립령」에 근거해「공유수면매립법」이 제정될 때부터 예측된 일이었다. 개인이나 기업이 갯벌을 매립하면 그 토지소유권을 획득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포호는 이후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유당농산이 대규모 돈사를 운영하면서 창포호와 인근 청계만의 오염을 가중시키는가 하면, 골프장을 건설해 지역주민들과의 갈등이 부각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창포호 준설과 관련된 사건이다. 2004년 호남대 모교수에 의해 진행된「창포호준설타당성보고서」에 의하면 창포호 수질개선을 위해서는 8m 깊이로 창포호 일대를 준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보고서를 보면 창포호에서 관찰되는 조류가 4종 밖에 없는 등 환경적인 가치가 떨어지는 지역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하지만 시민단체가 나서 조사한 결과 창포호에는 천연기념물 수달을 비롯해 고니와 노랑부리백로 등 수십종의 조류가 관찰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물론 재하청을 통해 용역에 참여했던 한 연구소가 용역팀에 제출한 보고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책임연구자가 그 내용을 누락했고, 누락사실이 확인되고 말았다.

여기에는 당시 무안군의 행정적인 지원도 뒷받침되었다. 준설토를 간척지에 복토하는데 사용하도록 특정업체를 지원했던 것이다. 결국, 개인업체의 막대한 이익을 위해 전문가와 행정이 든든한 뒷받침을 해준 셈이다.

다행히 시민사회의 문제제기와 지역 언론의 끈질긴 제기로 준설은 백지화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창포호’,‘창포간척지’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계속 불려지길 기대한다. 언제부턴가 간척사업자 개인의 호인‘유당’이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설립한 학원에‘유당’(광주 서석중고의 재단인 유당학원)을 사용하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어민들을 모두 몰아내고, 창포호와 청계만 환경오염을 가중시키고, 개인이익을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는 사람의 호를 쓰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무안국제공항이 바라다 보이는 창포간척지 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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