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기 논설위원(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대한민국 국민들이나 조국을 떠나 국제사회를 무대로 활동하는 해외동포들이 한민족임을 가장 자랑스럽게 느끼는 경우가 언제일까? 아마도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 태극 마크를 단 선수들이 다른 국가 선수들을 누르고 승리할 때 일 것이라 생각된다. 지난 3월 한달 동안 정치권의 파행과 금품수수 등의 사건이 연일 계속 터지고, 세계 경제위기의 여파로 국내 경제지표가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 속에서도, 국제대회에서 승리하는 스포츠 선수들 덕분에 한민족으로서 자긍심을 느끼며 행복했을 것이다.

지난 3월 29일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열린 2009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여자 싱글에서 207점이란 사상 최고 점수로 금메달을 따낸 김연아 선수가 애국가를 부르며 흘리는 눈물을 보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대회 우승으로 김연아 선수가 창출하는 경제 효과는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 한국의 국가브랜드 상승효과와 함께 경제 불황 속에서‘희망 효과’로 확산되고 있다. 태극기를 배경으로 감격의 눈물을 흐르는 김연아의 모습을 본 수많은 세계인들은‘김연아와 대한민국’이 하나라는 이미지를 강렬하게 심어주었다. 영국 하면 축구스타‘베컴’, 러시아 하면 코트의 요정‘샤라포바’가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김인식 감독이 이끄는 한국 야구대표팀이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미국, 쿠바, 일본 등 야구 종주국들과 고군분투하며 값진 준우승을 일궈냈다. 한국 대표팀이 우승은 못했지만 경제위기를 맞아 시름하는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고, 고달픈 현실을 잊는 청량제 역할을 충분히 했다. 한국 야구팀이 우리 사회에 남긴 메시지는 팀워크, 즉 사회통합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의 주요한 기능 증에 하나가 국민통합이라 할 수 있는데 스포츠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스포츠는 정치가 해야 할 국민통합이라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보이기도 한다. 다른 국가와 경기를 응원하며 한민족 구성원이라는 것을 더욱 강하게 일체화하고 응집력을 강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미사일발사문제, 개성공단 폐쇄 등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 속에서 201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 5차전을 위해서 북한 선수들이 서울에 왔다. 지난해 8월 평양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남북한 축구 예선 경기가 태극기 게양문제와 애국가, 남한 측 응원단 문제 등을 이유로 북한이 국제규범을 무시하고 거부함으로서 FIFA(국제축구연맹)중재 아래 결국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되었다. 순수해야 할 스포츠에 정치적 입김이 작용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이번에 서울에 온 북한 김정훈 축구감독은 기자들이‘북한’이라고 호칭한데 대해 매우 불편해 했다. 김 감독은 31일 서울월드컵경기장 인터뷰룸에서 4월 1일 경기를 앞두고 열린 양팀 감독 기자회견에서 우리 측 기자들이‘북한’이라는 표현을 쓰며 질문을 하자 “우리의 정식 국가 명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북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말라”며 직접적으로 불쾌한 언사를 드러냈다. 경기 결과 한국이 승리하여 남북한이 조 1,2위로 본선 동반 진출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한민족의 파워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최근 사례들은 스포츠의 정치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원래 스포츠는 승패를 갈라야만 하는 경쟁적 특성으로 인해 공동체의 정체성 형성에 효과적인 매개물로 기능해 왔다. 국가나 민족이 다른 이민족과 승패에 자존심을 걸고 싸우는 민족사적 영역으로 변신한 것이다. 한국에서 스포츠는 민족주의의 강력한 기제였고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저항적 스포츠 내셔널리즘으로 자라났다. 특히 일본과의 스포츠 경기는 스포츠가 아닌 반드시 이겨야하는 전쟁과 같다. 또한 스포츠는 국가브랜드 상승효과와 함께 국민들에게 활력과 희망을 주고 해외동포들에게 민족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고도의 현란한 정치 외교적 언술을 쏟아내는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의 말 한마디 보다 순수한 스포츠 스타의 말 한마디가 우리의 마음을 더 움직이고 행복하게 한다. “나라가 없으면 야구도 없다”는 김인식 감독의 발언은 매우 정치적이지만 백번 들어도 기분이 좋다. 특히 2009년은 일제 강점기 나라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3.1운동 90주년, 광주학생독립운동 80주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스포츠인 김인식 감독의 발언은 나라 없는 피지배 약소민족의 설움을 겪어 보지 못한 해방이후 세대들에게 주는 메시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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