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운동가 황 의 선

‘사람의 서사시는 십자가의 길과 그렇게 닮을 수가 없다’고 했던가.

광막하고 머나 먼 땅 중국에, 장작더미를 쌓고 두 동지의 시체를 올렸다.

“여섯 시간 동안 대륙의 밤을 붉게 타오르며 동지들의 넋이 하늘의 별이 되어 사라지던 날은, 내 생애의 가장 잊을 수 없는 날이다.” 황 의선(79세)애국 지사. 그는 현재 무안군의 생존해 있는 유일한 독립 운동가이다.

2002년 여름, 스물 한 살 박지성은 ‘대한민국’이라는 이 땅 위에 신화를 만들고 영원한, ‘아름다운 젊은이’가 되었다.

1944년 같은 나이 스물 한 살, ‘묻지 마라 갑자생’ 황의선은 일본 증병1기이다. "절망으로 고향 학다리 역을 출발하면서 어떻게 슬프던지 정읍까지 울고 갔어요. ”

나라 없이 이끌려 가던, 황의선. 그는 단번에 스스로 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생명이었다. 목적도 목적지도 잃은 채, 평양 제 48부대에 도착했다. 일주일 후엔 중국 전선에 전속이 되고 산서성 태원에서 ‘일본 군인 됨’에 있어 일치의 착오도 없는 엄격한 훈련을 받는다.

밤엔 중국 군의 습격에 대비하고 낮엔 말, 글, 행동까지… 일본 군인 그 자체가 되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래도 구월의 밤은 왔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보름 달. 그는 고
국의 추석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괴로웠다. 그리고 슬펐다. 나라 없는 인간의 아픔. 명백한 한국인의 몸과 들 끊는 자신의 피 위로, 일장기가 새겨진 군복과 일본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자신의 신세는 신음, 그대로였다.

결단했다. ‘탈출을 하자. 그리고 내 나라를 찾자’. 떠나올 때 기차역까지 배웅왔던 맏형(황부실)의 말도 떠올랐다. “만약 중국으로만 가거든, 임시 정부가 중경(重慶)에 있으니 어떻게든 탈출하라.” 일본군 40사단에 소속되어 남쪽으로 향하던 그는 치밀한 준비를 했다.
생명이 제 참된 생명을 되찾기 위해서는 달라져야 했다. 먼저 일본 군인들의 충분한 신임을 얻었고 활동의 폭을 넓혔다.

뜻은 생명의 노릇을 해 주었다. 다음에 올 자유로운 생명에 대한 믿음은 탈출을 기도하는 총살형의 투혼을 두렵지 않게 했다. 마침내 중국 옷을 입은 남녀가 한국 말을 주고 받는 것을 목격했고, 기회 있을 때 마다 한국 사람이 사는 곳을 수소문 했다.

“하늘이 도와 위안부를 알선하며 사는 중년 여성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일본 군복을 입은 정신대 아가씨까지 소개 받고 나서, 서로가 한국인이 틀림 없음을 확인 하는 순간 우리들은 부등 켜 안고 울었습니다”. 고향도 물어 볼 여유 없이 ‘장사부근에 임시 정부 기관에 신문사가 있다고 하니 그리로 찾아 가라’는 정보만 얻은 채 ‘서로 살아 다시 꼭 만나자’는 기약도 없는 인사만 남기고 헤어졌다.

부대에 돌아와 탈출에 의기 투합한 강재식, 이용상등 다섯 명은 생 쌀과 소금, 수류탄으로 무장한 채 무조건 서쪽을 보고 강을 따라 뛰었다. 3일 밤과 낮. 잡히고 위기를 넘기기를 몇 번, 3박 4일의 시간들을 어제처럼 생생히 기억해 내는 그에게는, 그만큼 생과 사가 함께 살아 흐르던 시간이었다. “저는 일기를 꼭 써요.

그 때의 탈출기를 <다시 가보는 머나먼 여로>라는 자서전으로 남겼습니다.”

김구 선생이 중국 측에 30만 명의 한국 군인이 투항하거든 받
아 들여 달라는 부탁을 해놓았단다. 중국 화석(花石) 유격대 사령부에 그들이 도착하여 망명을 했을 때, 중국 소장은 그와 동지들을 끌어 안고 ‘친구’라 부르며 극진한 환영을 했다.

그 후 장사시(長沙市)에서 중경까지 8,000km. 중국군 호위를 받으며 ‘드디어 광복군이 되던’ 중경까지 70일은 잊을 수가 없다.

어느 큰 마을에 도착했을 때 였다. 동네 사람들이 마을 어귀까지 나와 열열히 환영을 해 주었다. 여고생 기숙사를 숙소로 주었는데 침대가 어찌나 깨끗하고 화려했던지 자신들의 지치고 더러워진 몸을 뉘이기가 황송했다. 학생들은 그들에게 중국 말로 ‘오빠’라 불렀고 음식과 빨래를 해주었다.

한 부잣집 규수는 리더자인 그를 특별히 집으로 초대하고 중국 역사책을 보여 주며 상고사 중 ‘기자조선’의 내용을 펼치며 ‘고대부터 당신의 나라와 우리 중국은 형제지국’이라며 온정을 다 해줬다. 떠나오던 날 파티가 열렸고 ‘한국의 아리랑을 합창해 줄수 있냐’고 했다.

선조들 가운데 하나의 역사가 이어지다, 그 시간 감동으로 피어나던 아리랑! 그들은 답가로 손문이 지은 ‘국민당 당가’를 청했고 중국 주민들과 학생들 역시 감동으로 노래를 불러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그를 눈물 짓게 하는 것은 김춘갑과 장의환, 두 동지 죽음이다.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만리 장강을 사이에 두고 타국의 장작나무 위에 사그라져 가는 그들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일이다.

46년 광복군은 해산되었다. 고향에 돌아 온 그는 농사를 짓고 부모를 모셨다. 그리고 야학에서 글을 가르쳤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 온 아들이 군대에 가는 일만은 반대했던 부모님. 그럼에도 1948년 봄, 김구 선생의 권유로 서울에 올라와 육사 1기 시험을 봤다. 졸업하자 6.25가 터졌다.

소령으로 김포 전투를 시작으로 김홍일 장군과 남원, 진주, 포항 전투 등에 함께 했다. 휴전이 되고 그로부터 대령이 되기까지, 군 장교로서 많은 역할을 했다.

“특별히 논산 훈련소 군수 처장으로 있을 때는 아내와 함께 훈련병의 입소 때 마다 떡을 해서 훈련소를 찾았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자신의 젊은 날 징용으로 끌려가던 시절을 생각해서 였다. 그의 사연과 떡 앞에서 고향 무안의 신병들은 감동했다.

5.16 혁명이 일어나고 사회 개혁의 하나로 농협이 생기고 군인 대표로 사회로 나오게 되기 까지 칠년 육개월의 군대 생활이었다.

군복을 벗은 후, 전라 남. 북도와 경기도 농협 도지부에서 도 지부장으로서 새 일을 했다. ‘근면과 성실, 근검 절약, 대의 명분’인 자신의 인생관은 ‘공직 생활 26년 동안 시말서 한번 써보지 않았다’는 말이 대신한다.


팔십으로 지금도 "광복회" 현장에서 일 하는 그에게서는 매사에 섬세하고 최선을 다 하는 숭고한 삶의 향이 고스란히 전해
져 온다.

가족이야기를 묻는 필자에게 만면 가득한 웃음과 함께 “자랑할 것이 하나 있어요. 3남 3녀 중 대학 교수가 7명입니다”
다시 보람된 일을 묻는 필자에게 “정년 퇴직 후 ‘독립 애국 정신 홍보 위원’이 되어 독립 운동가 5명이 전국을 다니며 7년 동
안 애국 교육을 시키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감명 깊었던 일은 동학 혁명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황토현에 높이 20M가 넘는 ‘동학 혁명 기념탑’ 건립 추진 위원장으로서, 5만 여명의 사람들 앞에서 대통령보다 먼저 기념사를 했는데 그때 혁명가로서의 진정한 보람을 느꼈습니다.”

위대한 존재가 될 것인가, 노예가 될 것인가?
잊고 있던 사람의 서사시가 떠올랐다. 죽음을 택해 죽음을 넘어 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십자가의 길’
황의선 애국지사. 그는 조국 광복을 위해 붉은 주단이 되었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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