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작가 박화야가 만난 사람

노래로 자유로, 세상을 날고 싶은 여자
가수 정 다 오.

‘새의 선조들은 본디 땅 위를 걸어 다니는 네발 짐승이었다. 그들은 하늘을 그리워 하는 일념 하나로 욕심을 주리기 시작했다. 몸을 적게 할 뿐만 아니라 뼈 속까지 비웠다. 앞의 두 다리가 차차 날개로 바뀌어 갔다. 드디어 새들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었다.’

서늘한 눈매에 덧붙인 마스카라, 훤칠해 보이는 키와 허스키한 목소리, 거침없는 어휘들로 흐르는 듯 빠른 템포의 이야기가 막힘이 없고 생명의 율동이 강하게 느껴지게 하는 여자 정다오(48).
그녀는 새가 하늘을 날 수 있는 자유를 얻듯 노래로 이땅과 세상을 날고 싶다. 새들이 비상을 위해 욕심을 줄이고 드디어는 얻어낸 놀라운 기도처럼 그녀 역시 자신의 삶에 모든 순간들과 모든 존재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사랑처럼, 그렇게 온 정열로 노래를 하고 싶은 거다.

시골 면장이던 할아버지, 세 명이나 되던 일꾼, 온 동리 사람들이 집 마당에 모여 식사하던 모습, 집안 작은 연못에서 고기들과 연꽃이 수런거리던 모습은 유년의 기억에 자리 잡은 유복한 시절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언제부턴가 집안에서 노래 소리와 춤과 악기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음악 선생을 두고 못 다루는 악기가 없었다.

거미의 길은 제 속에 있다고 했던가. 이미 그녀의 갈 길은 그런 아버지로부터 품고 나왔다. 이제 제 속에 있는 본성을 뽑아 내면 제 길이 될 터인데 웬지 아버지는 그녀가 노래 하는 것을 막무가내 반대했다. ‘한량 이셨던 아버지의 세월이’ 가세를 기울게 했고 그녀가 여고를 다닐 무렵쯤엔 그 많던 재산이 보따리 살림이 되어 나주와 무안을 오 가는 혼돈으로, 그녀는 세상에 최초의 어두운 밤을 보게 된다. 더 이상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는 현실의 전복은 인생의 쓴 맛을 톡톡히 알려 준, 절망의 시간이었다.

키가 컸던 그녀는 여고 배구부 선수였다. 노래를 위한 진학을 포기하고 직장에 들어가 배구선수로 활동했다. ‘라면도 잘 못 먹던 시절 자장면과 고기를 실컷 먹여 주던 배구 선수 생활이 좋았다." 언니는 예뻤다. 예쁜 언니가 남자를 사귀다 아버지께 매 맞는 걸 보고 자신은 연애 한번 못해 봤다. 나이만 들어 가는 동생이 안타까워 언니가 주선하여 맞선을 봤다. ‘이상만은 하늘을 찌르던’ 그녀에게 지금의 남편은 마음에 차지 않았다. 언니의 강권으로 예단이 오고, 20일 만에 차 한잔 마셔보지 못한 채 결혼을 했다. 그런데 웬 걸 사랑이 좋았다. 젊은 날의 희망이 꺾인 노래에 대한 포기, 학업중단 등으로 어쩌면 황폐해졌을지도 모를 자신을 따뜻하게 포옹해 주는 남자가 좋았다.

사랑의 길은 새로운 길이었다. 이 환하게 트인 길을 남편과 함께 나아가고 싶었다. 그녀는 임산부가 되었지만 걷어 붙이고 일을 하여 손수 기저귀와 아기 옷을 준비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학벌도 직장도 없는 그러나 자신을 끔찍이 사랑해준 남편을 위해 가정의 반석이 될 것임을 결단한다.

그 후 두 아들은 대학생이 되었다. 건축학과와 설계학과에서 독립된 인간으로서 미래의 주체가 되고자 열심히 공부하고 직장도 없던 남편은 버젓하니 서울 사대문 안에서(양재동) 횟집을 경영한다. 집에서 굴러가는 자동차만 4대나 되니 이젠 스스로 중류라고 말할 수 있다.
지성으로 남편의 일을 돕고 아이들을 키운 그녀에게 행복한, 빛나는 밤이 온 것이다.

감사했다. 아직도 정정하신 100세가 넘으신 할머니. 그녀가 어릴 적부터 다니던 교회를 지금도 나가신다. 역시 그녀도 순복음 교단에서 신앙생활을 한다. 필자와 만나는 잠시에도 담임 목사로부터 두 번씩이나 전화가 왔다. 그녀의 교회 내 봉사 활동 또한, 어느 만큼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심성이 곱다고 하고 인간성이 좋다고 말한다. 그 위에 돈독한 신앙이 겹쳤으니 누구든, 보면 주고 싶고 돕고 싶다. 또 그렇게 실천하며 살아 왔다.

모든 게 가득해진 현실, 그럼에도 그녀에게 한 가지 남은 갈망이 있다. 제 속에 아직도 맘껏 뽑아 내지 못한 노래, 그 노래가 있어 그녀는 늘 갈 길이 먼 나그네마냥 시간을 재촉한다.

맘껏 하고 싶은 노래. 그러나 “뜨면 간다”며 반대하는 남편. 물론 그 동안 가수라는 이름으로 15년을 활동했다. 그러나 아직 ‘무명의 가수’인 것은 그녀의 남편이 유명가수가 되어 ‘뜨면 자기 곁을 떠나게 될 것’이라며 본격적인 활동을 반대 한다. ‘남편과 헤어지고서라도 맘껏 노래하고 싶지만’ 아이들과 남편, 자신이 산산이 상처 나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다. 오직 한가지 비는 것은 이제 오십도 눈 앞에 두었으니 ‘나를 너무나 사랑한 그들(남편과 아들들)’이 ‘나 좀 나줬으면’ 한다.

이제 ‘내 인생을 찾고 싶다’. ‘정진희’에서 ‘정다오’로 이름도 바꾸고 이미 발표되고 불려진 <더불어 가는 길>에 이어 <내 사랑 하는 당신>이라는 노래를 취입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그녀는 노래로도 많은 봉사를 했다. 한학 공부를 많이 하셨던 아버지. 어떤 연유인지 자신을 향해 “너는 전생에 지은 죄가 너무 많은 사람으로 이 땅에서 나왔으니 특별히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한다”며 선한 일을 많이 할 것을 유언처럼 남기 셨다. 그녀는 생각했다. 내 자식을 가장 잘 아는 내 아버지의 말씀인데 얼마나 지당한 말씀이겠는가. 군부대 위안 잔치, 노인 위안 잔치, 장애인을 위한 위문공연, 고향 향우들을 위한 모임 등 가보지 않는 단체가 없다. 지금도 월드컵 성공 기원을 위한 환경미화원 식사 대접, 연예인 잔치를 계획하고 있다.

못다한 노래의 한을 뚫고 싶은 여자. 그래서 햇빛처럼 세상 곳곳에 스며들어 모든 생명체들과 교감되는 노래를 부르고 싶은 여자. 여성 기업가가 되어 물질로도 도움이 되어 이 땅에 흩어진 안쓰러운 생명들을 거둬내고, 그것이 세상에 나온 자신의 흔적임을 확인하고 싶은 여자.

정다오. 그녀는 절실했다.
개인적인 자아의 제한으로부터 해방되고, 새로운 자기이해를 얻어 진정으로 자유자가 되고 그 영혼으로 자유의 노래를 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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